[가을, 사비(3)] 소나무 산에 심은 부흥의 기억

by whiteshore
3472595050675376976.jfif 관북리와 부소산성이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


부여의 가을은 부소산성에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이 산성은, 평상시에는 왕실의 아름다운 후원이었고 비상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보루였습니다. 관북리를 중심으로 한 왕궁 및 저자와 함께 사비도성의 근간을 구성했지요.

3472595050730721360.jfif 부소산성으로 향하는 부소산문


부소산문을 통해 잘 포장된 산책로를 조금만 걷다 보면 ‘부여 삼충사’가 나옵니다. 백제의 마지막 충신,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지어진 전각입니다.


3472595050720040016.jfif 부여 삼충사 전경.


본래 삼충사가 있는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무려 7000평 규모의 대형 신사가 지어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부여의 심장인 부소산성에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부여 신사’를 세우려 했습니다.


백제사 전체가 ‘내선일체’라는 허무맹랑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될 뻔한 것이죠. 말할 것도 없이 한일고대사를 악용해 식민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80%의 공정률로 완공을 목전에 뒀던 신사는 당연히 해방 후 철거를 면치 못했죠. 그리고 그 부지에는 백제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가 들어섰습니다.


3472595050723156048.jfif 계백(가장 오른쪽)을 포함해 삼충사에 모셔진 백제 말기 충신들의 초상화.


일본 신토 신앙의 거점이 될 뻔한 장소에 한국인의 기층정서인 충(忠)의 이념을 상징한 건물이 올라온 셈이죠. 그러니 삼충사는 사실 백제 보다는 정확히는 한국적 공간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부소산성의 산책로를 걷다 보니 백제의 가을은 더욱 깊어집니다. 오전 햇살에 빛나는 가을 단풍의 환영 인사가 눈부십니다.


3472595050685448272.jfif 부소산성에 위치한 반월루. 과거 부소산성은 반월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백제의 왕들이 후원을 산책하면서 찾았을 옛 절터, 서복사지와 주인 잃은 천 수백 년 전의 기왓장들이 떨어지는 단풍잎을 맞이합니다.


3472595050681779280.jfif 부소산성 내에 위치한 백제 서복사지. 백제 왕실의 '기원사찰'로 추정된다. 절터 뒤쪽에 목탑지의 흔적이 보인다.


백제의 태자들이 거닐었다는 ‘태자골 숲길’에 자란 나무 사이로 드는 볕 또한 다정하고 평화롭기만 합니다.


3472595050701960528.jfif 부소산 내에서 발견된 기와들


그러나 어느덧 가을 부소산은 단풍 속에 숨겨둔 상흔의 장소들로 자연스레 우리를 이끕니다.


태자골 숲길 근처를 거닐다 보면 나무들 사이로 단층의 목조건물이 나옵니다.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입니다.


3472595050690716240.jfif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 백제 때 군영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 움집터 3곳이 발견됐습니다. 백제 때 수도를 방위하던 군사들이 머물렀던 군막으로 추정됩니다. 건물 주위에 목책 구멍도 발견됐고요. 주거지 바닥에서는 금으로 만든 봉황과 토기, 기와, 갑옷 파편과 무기 등이 출토됐습니다.


3472595050693780816.jfif 자료관 내에 일부 복원된 제3호 수혈 주거지. 백제장병들의 거처로 추정된다.


이곳을 포함해 부소산성에는 200여 점의 다양한 철제 무기들이 나왔습니다.


무기들은 예전에 동문과 북문이 있었던 자리에서 주로 발견이 된다고 합니다. 사비도성의 마지막 날, 부소산성의 북쪽과 동쪽 성벽에서 최후의 격전이 있었다고 학자들이 추측하는 이유입니다.


3472595050707320656.jfif 부소산의 가을 단풍


백제 멸망의 서사는 부소산 북쪽, 백마강과 맞닿은 낙화암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꽃처럼 떨어져 내렸다는 삼천궁녀의 비극적 설화는 부소산과 백마강을 비극의 공간으로 기억하게 하지요.


3472595050715075152.jfif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 1920년대에 만들어진 정자다.


낙화암에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자 백화정도 있습니다. 천장에는 백제 수막새를 본 딴 듯한 연꽃도 그려져 있네요.


3472595050712773968.jfif 백화정과 낙화암은 백제 망국의 비애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백마강 변에 있는 고란사에서 비감은 더해집니다. 암자의 벽면에는 백마를 탄 나당연합군, 불타는 건물, 그리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강으로 몸을 던지는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3472594408228278608.jfif 고란사 내 전각의 벽면에 그려진 삼천궁녀 설화.


지난 수백 년간 부소산을 오르내린 조선의 문객들은 실체 모를 삼천궁녀의 절개를 칭송했고, 민중들은 덧없이 져버린 백제의 청춘들을 동정해 왔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부소산성은 멸망의 서사보다는 사비 천도와 백제 중흥의 역사와 더욱 어울리는 곳입니다.


상술했듯, 부소산성은 천도가 결정되기 이전부터 군사 거점으로 이미 존재해 온 성입니다. 즉 사비 도성의 탄생부터 마지막 순간을 바라본 곳이죠.


3472595050719983696.jfif 부소산성 내부를 산책하는 시민.


특히 천도가 결정되기 전부터 이곳은 백제인들에게 각별한 장소였습니다. 산의 이름을 들여다보면 보다 확실해집니다.


'부소(扶蘇)'는 백제의 고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소나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부소산은 ‘소나무 산’인 셈이죠.


일부 논문에 따르면 백제인의 뿌리 중 하나인 부여인들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하는 길목마다 자신들이 정착한 산 이름에 ‘소나무 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성왕이 도읍을 옮긴 이곳에 부소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죠.


3472595050714016592.jfif 부소산에서 내려다본 금강(백마강).


성왕에게는 아버지 무령왕이 단순히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과는 또 다른 포부가 있었습니다.


재위 16년을 맞이하던 538년의 어느 봄날, 성왕은 신하들 앞에서 건국 후 수백 년간 이어온 국호를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수도도 사비로 옮기겠다고 결정하지요.


성왕이 제시한 새 나라의 이름은 남부여(南扶餘). 우리는 단순히 부여의 후계 정도가 아닌, 남쪽의 정통 부여라는 의미겠지요. 오늘날의 부여군의 이름 역시 이때 기원한 것이고요.


성왕이 재위에 오르기 약 30년 전, 만주에서 명맥만을 유지하던 부여라는 고목은 마침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여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부여의 후신을 자처하던 고구려였습니다.


그간 부여의 후예임을 주장하며 일정 지분과 정통성을 주변 나라에 강조해 온 백제입니다.


때문에 백제는 아버지 격의 나라인 부여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불의함을 꾸짖고, 나아가 부여라는 관념적인 구심점을 통해 한성과 북방에 기반을 뒀던 귀족들의 지지도 얻어내려 했습니다.


사비 천도는 이런 남부여 건국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이었습니다. 요컨대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에게는 ‘새로운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던 것입니다.


성왕은 불교와 유교의 이상세계를 남부여의 수도, 사비에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화려한 불교문화와 성숙한 율령 체제가 더해진 계획도시 사비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죠.


백마강에서 다시 부소산성의 단풍 숲을 따라 부소산성 서남쪽 언덕 위로 오릅니다.


백제 때 누각이 있었던 곳에는 반월루가 새워져 있습니다. 관북리를 포함해 멀리 백마강과 부여군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3472595050686871632.jfif 부소산성 반월루. 멀리 사비 백제의 젖줄이었던 금강이 보인다.


성왕 역시 부소산에 올라 이같은 풍경을 보며 새로운 시대를 설계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곳에 심어놓은 이상세계의 흔적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성왕에게 이곳은 단순히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터전 그 이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곳에서 백제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의 정체성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472595050687299664.jfif 부소산성 반월루에서 내려다본 부여 시가지


성왕은 사비를 중심으로 행정 체제를 공고히 하고 불교를 융성케 하며, 백제를 다시금 찬란한 문화 강국으로 일궈냈습니다. 이때 정립된 백제 고유의 미학은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 주변국들의 소중한 문화적 토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장소의 의미는 우리가 그곳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백제는 그날의 사비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고, 그 향기는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부여의 산과 들 위에 아련히 머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부소산은 지금 어떤 빛깔로 물들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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