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부여의 들과 산은 생기와 여운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풀냄새는 싱그럽지만, 발치에 닿는 햇살의 밀도는 한층 낮고 깊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부여 시가지를 살짝 벗어나 백제의 가장 찬란했던 꿈과 처절했던 눈물이 교차한 곳, 부여 나성과 능사 터로 향해봅니다.
부여 백제왕릉원 동쪽, 능선을 따라 감도는 부여 나성(羅城)을 마주합니다.
언뜻 보면 그저 나지막하고 소박한 돌담처럼 보이지만, 이 성벽은 538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며 축조한 한반도 최초의 '외곽성'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성곽'이라는 단어 동아시아의 도성제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내부의 성벽은 ‘성’, 바깥의 벽은 ‘곽’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조를 비교적 가장 이른 시점에서 수용한 사례가 바로 부여 나성입니다.
동아시아의 외곽성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기 때문에 백제는 물론, 동아시아 도성제와 축성 기술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곳이지요. 그렇기에 세계유산으로도 인정을 받았고요.
산성과 금강을 연결하며 수도 전체를 감싸 안은 이 ‘미학의 경계’ 위에서 백제는 사비라는 이상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비성은 크게 북으로는 부소산과 금강, 서로는 금강으로 막혀 있습니다. 동쪽은 산지와 평야가 섞여 수도 방위를 위해서는 인공의 장벽을 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견고한 축성 기술의 흔적이 제일 잘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 동쪽 구간, 즉 동나성입니다.
동나성으로 향하니, 낮지만 견고한 돌벽이 평야와 흙 둔덕을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성벽 앞에 멈춰 서서 투박한 성벽을 어루만지며 걸어 봅니다.
그러다 보니 유독 검게 그을린 성벽 일부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옵니다. 1400년 전, 사비성을 집어삼켰던 나당연합군이 지른 불길의 흔적일까요? 아니면 성을 지키려던 이들의 절규가 남긴 역사의 화상(火傷)이었을까요?
나성은 최후의 날 그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 출전을 명 받은 백제의 장수와 병사들이 수없이 성문을 드나드는 모습을 지켜봤을 테지요.
나성을 통해 격전지로 달려 나갔던 백제의 마지막 군주는 아마 수도를 사비로 옮긴 성왕이었을 겁니다. 왕은 무령왕 때부터 다져온 수십 년간의 국력을 바탕으로, 한성백제 멸망 후 백제의 숙원이었던 한강 유역 수복에 나섰습니다.
무령왕 때도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회복한 적은 있었지만, 지속적인 영유에는 실패했지요. 성왕의 접근법은 달랐습니다.
왕은 우선 치밀한 사전 작업에 나섭니다. 성왕은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가야 소국들과 왜의 사절을 사비로 불러 모으는 이른바 '사비 회의'를 주도합니다.
이는 근초고왕 때 그러했던 것처럼 남방 세력을 안정시키고 북방 경략에 전념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굳건한 가야·왜와의 관계, 그리고 신라와의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마침내 551년,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옛 고토,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탈환합니다. 100년 만의 염원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달콤한 승리의 순간은 짧았습니다. 본시 대외 원정은 국력을 크게 소모합니다. 전쟁의 피로감은 백제 귀족들의 반발 등 내부의 혼란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성왕은 결국 군을 한강 이남으로 다시 물리게 되지요.
군의 재정비와 추가 영토 확보를 위한 전략적 후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왕은 신라의 성장이라는 중대 변수를 간과했습니다.
551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버려둔 한강 하류를 점령한 뒤, 그곳에 '신주(新州)'라는 행정단위를 설치합니다. 이로써 120년간 끈끈한 동맹이었던 양국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백제 왕실은 큰 위기감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신중한 성품의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복수전에 조심스러웠으나, 20대의 혈기 방장하던 태자 창(昌)은 달랐습니다.
원로대신들이 전쟁을 반대하자 그는 "늙었도다! 어찌 이리 겁이 많은가!"라며 일갈했고, 아들의 패기에 마음이 움직인 성왕은 결국 관산성으로 향하는 비극의 길을 선택합니다.
554년의 여름,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한반도 중원의 요지 관산성(충북 옥천)으로 들이쳤습니다. 처음엔 창의 진두지휘 덕에 백제군의 기세가 파죽지세였으나 신라의 명장 김무력이 전선에 나오면서 전세는 곧 팽팽해졌습니다.
어느덧 전선에는 겨울이 찾아들었고, 전장의 아들이 걱정되어 소수의 정예병력만 이끌고 전선 본진으로 향하던 성왕은, 운명의 장난인지 그만 신라 매복군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일본서기>는 왕의 최후를 생생히 전합니다. 신라의 노비 출신 장수 고도(苦都)가 왕의 목을 치려 하자, 성왕은 담담히 말하며 목을 내밀지요.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고통이 항상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왕의 목은 신라 북청 계단 아래 묻혀 뭇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겪었고, 백제는 좌평 4명과 3만 명의 군사를 잃는 대패를 당합니다.
이 패배로 가야 소국들은 세력을 잃고 10년 후 결국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백제의 중흥 역사도 산산조각 났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왕자 창은 출가까지 결심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백제 제27대 위덕왕입니다.
백제 때 동나성 바깥 부여왕릉원 옆에는 ‘능사(陵寺)’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입니다. 절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다만 부여 백제문화단지에는 1대 1 크기로 복원된 능사가 있습니다. 내부에는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금동대향로 모형이 놓여 있고, 현재도 실제 스님들이 경문을 외면서 불공을 드리기도 합니다.
능사는 지난 1995년, 사리를 안치하던 석조 사리감이 발견되면서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임이 알려졌습니다.
사리감에는 위덕왕의 누이가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연대와 창건 시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덕왕의 사리감은 국보로도 지정이 되지요.
앞서 1993년 능사터의 진흙 속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도 위덕왕과 인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향로는 왕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을 때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창건 시점에 비춰보면 어쩌면 위덕왕이 바치는 속죄의 헌사였을지도 모르지요.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나 당시 삼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 정도로 조형이 세밀하고, 유려하며, 제작 기술이 뛰어납니다.
정교한 수준 때문에 한때는 중국 등 외부 제작설도 있었으나 최근 능사 터에서 발견된 공방(대장간) 흔적을 통해 순수한 백제인의 손끝에서 이 걸작이 탄생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높이 약 62센티미터에 무게 약 11.8킬로그램의 금동조각에, 장인들은 백제의 불교적 이상과 도교적 이상이 결합된 초월적 세계관을 빼놓지 않고 담았습니다.
향로의 받침에는 물밑의 용이 생명의 상승과 재생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지요. 그리고 향로 밑부분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연꽃을 형상화했고요.
신선과 괴수들이 뛰노는 향로의 뚜껑 위에는 다섯 명의 악사가 거문고, 완함, 배소, 종적, 고(북)를 들고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며, 죽은 왕들의 영혼을 달랩니다.
향로 속 산골짜기 사이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금동빛의 악사들이 마음속에서 연주했을 위로의 음악은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고통 또한 같이 씻어냈을 것입니다.
왕들의 그리움이 어려있는 대향로의 정점에는, 날개를 우아하게 펼친 봉황이 가슴을 내밀고 있습니다. 봉황의 가슴에는 작은 구멍이 2개 나 있는데 향이 피어오르도록 하기 위해 만든 향연 구멍입니다.
향로에서 신비로운 향이 피어올라 봉황의 몸통으로 감싸는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위덕왕도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그 원죄 같은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백제금동대향로는 귀하신 체급에 걸맞게 올해 12월부터 국립부여박물관 내 독자적으로 마련된 전용 전시실에서 그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 주는 고요한 몰입감처럼, 이제 부여에서도 백제 예술의 정점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유의 방이 비워냄을 통한 평온을 선물한다면, 대향로의 전용 전시실은 억겁의 시간을 견뎌낸 생명력과 마주하는 경이로움을 선사합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향로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보물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 스스로를 던졌던 이들의 손길로 향하게 됩니다.
660년 사비성이 불길에 휩싸이던 날, 절의 장인인지 승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향로를 천으로 소중히 감싸 능사의 목제 수조 깊은 곳에 숨겼습니다.
침략자의 손길로부터 왕의 영혼을 지키려 했던 그 절박한 손길 덕분에, 향로는 1400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대향로의 사무치는 숭고미 속에는 인간사의 이상과 후회, 죄책감과 그리움이 모두 묻어나는 듯합니다.
우리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백제의 왕들과 장인들도 인간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이 금동빛의 향로를 통해 잠시 내려놓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성과 능사 터를 걸으며 마음속에 묵혀둔 후회와 그리움의 그림자를 조용히 가을 솔향기에 실어 보내봅니다.
백제의 가을은 그렇게,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위로를 오늘도 건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