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백제의 마지막 이상향이 장중의 대미를 장식한 땅, 익산에 닿았습니다.
사비가 화려하면서도 정제된 백제의 미학이 꽃 폈던 곳이라면, 이곳 익산은 한 시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던 군주의 거대한 의지가 서린 곳입니다.
익산 왕릉원 즉 ‘쌍릉’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많은 새떼가 비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납니다.
늦가을이면 익산 땅에는 까마귀가 유독 많습니다. 쌍릉 인근의 작은 차도에 내려보니 러시아에서 건너온 까마귀 떼와 함께, 비가 잠시 갠 틈을 타 하얀 백로 수 마리가 왕릉 위를 유영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년의 세월 동안 잠든 이를 수호하는 영물들처럼 보여 묘한 경외감이 일었습니다.
우중 인적이 끊긴 익산 쌍릉의 정경은 적막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말 그대로 두 개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두 무덤은 각기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자, 물을 머금어 더욱 푸르러진 소나무와 짙은 색의 가지가지 사이로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그 안개 너머로 1400년 전의 숲이 겹쳐 보이며, 금방이라도 백제의 왕들이 안갯속에서 걸어 나올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안개 낀 숲의 주인공은 바로 백제 제30대 국왕, 무왕(武王)입니다.
그의 일생은 이곳 쌍릉의 모습만큼이나 신비로운 설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를 '과부였던 어머니가 연못의 용(龍)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라고 기록합니다. 어릴 적 마를 캐어 팔며 생계를 이어가 '서동(薯童)'이라 불렸던 소년입니다.
신비로운 설화의 이면에는 치열한 권력 투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설화에 나타난 '용'의 정체를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학계에서는 그가 법왕 혹은 위덕왕의 서자이거나, 사비의 주류 귀족 세력에서 밀려나 변방 익산에 숨어 살던 방계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정통성이라는 빈약한 토대 위에서 고도의 심리전과 외교적 수완을 통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풍운아였다는 사실입니다.
서동에게는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로맨틱한 설화가 항상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는 변방의 왕족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 필요했던 강력한 '신화적 후광'의 흔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의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적국 신라와의 정략적 결탁이나 민심을 흔드는 고도의 정치적 선전이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용의 아들'이라는 수사도 어쩌면 기반이 약했던 그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 덧씌운 신화적 정통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왕은 왕릉원의 북쪽 미륵산과 미륵사지로 향할 수 있는 작은 차로 옆에 잠들어 있습니다. 경내 탐방로를 따라가자, 빗속에 젖은 거대한 봉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왕릉(大王陵)’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오랫동안 마한 무강왕의 능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근대에 진행된 발굴 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동일한 양식이되 그 규모는 훨씬 거대한 최상위급 왕릉임이 밝혀졌습니다.
사비 시대 양식의 왕릉급 무덤인데 익산에 묻혔다면, 자연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는 추정에 불과했기 때문에 피장자를 둘러싼 논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덤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8년 재발굴 당시 발견된 102조각의 뼈였습니다. 고고학과 법의학의 힘을 빌어, 드디어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임이 8년 전에서야 겨우 밝혀진 것입니다.
1400년 만에 빛을 본 유골은 우리에게 전설이 아닌 '인간 무왕'을 말해줍니다. 60대 이상의 노년까지 살았던 그는, 젊은 시절 낙마로 추정되는 심각한 척추 부상을 입어 평생을 그 후유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풍채가 당당하고 기개가 호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행간 뒤에는, 부서진 몸을 이끌고 41년 동안 백제의 중흥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늙은 왕의 고독한 투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골 분석 결과가 발표되던 날, 현장의 학자들이 무왕의 뼈 앞에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던 것은, 그가 견뎌낸 세월의 무게에 대한 경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왕릉의 거대한 봉분은 당시 당나라 황제릉(헌릉, 소릉)의 영향을 받은 최신 유행의 무덤 양식이었습니다. 이는 무왕이 사비의 중흥을 넘어, 당대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의 습속을 모방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야망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봉분은 점토와 사토를 10~15㎝ 두께로 번갈아 다지는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무덤의 높이는 4m 수준인데, 무덤의 성토 수준이 당시 백제 최고 수준의 사찰에 조성된 핵심 건물의 기단에 버금갈 정도로 정성을 들여 축조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사비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이자 근거지인 이곳 익산(금마저)에 왕궁을 짓고, 미륵사를 창건하며 제2의 수도를 세웠습니다.
죽어서도 그는 부여의 능산리가 아닌 이 외진 금마저의 대지에 누워 새로운 백제의 꿈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대왕릉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무덤, 소왕릉(小王陵)이 아직도 긴 침묵 속에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소왕릉은 대왕릉에 비해 고분의 규모가 작아 무왕의 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아직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곳의 주인은 서동요 속의 연인 선화공주일까요, 아니면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인 사택왕후일까요? 혹은 무왕이 정치적 풍랑 속에서 맞이했던 또 다른 인연일까요?
비에 젖은 쌍릉을 뒤로하며 생각합니다. 용의 아들로 태어나 마를 캐던 소년에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거인으로 살다 간 무왕. 그가 이곳 익산 땅에 묻히며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요.
그가 꿈꿨던 이상을 알기 위해서는 무왕의 영혼이 깃든 거대한 사원 미륵사로 향해야 합니다. 백제의 웅대했던 마지막 꿈이 마지막으로 가장 뜨겁게 뛰었던 곳으로 떠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