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설이 이어지다 최근에서야 잦아든 익산입니다. 맑은 날을 택해 익산의 시원, 금마면으로 향합니다.
금마의 너른 은빛 평원에 도착합니다. 고요하고 광활한 설원 뒤로 눈 덮인 미륵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앞에는 뽀얀 상아빛을 띤, 미륵불의 현신 같은 두 탑이 장중하게 서 있습니다.
이곳이 미륵사지(彌勒寺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꿈이 영근 곳이자, 한국사의 혈맥 속에 끈끈하게 남아있는 미륵신앙이 태동한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미륵사는 삼국시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동서 약 172m, 남북 약 148m 수준으로 동북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입니다. 이는 단순한 사찰 건립이 아닌, 무왕이 백제의 국력을 총동원한 국가적 대(大) 프로젝트였음을 시사합니다.
신라 황룡사 목탑에 버금가는 대형 목탑과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두 개의 석탑, 그리고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던 이곳은 백제가 구현하려 했던 인공적 ‘불국정토’ 그 자체였습니다.
적설에 덮인 미륵사지의 전경은 말 그대로 그토록 갈구했던 구원의 세계, 그 어느 모퉁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바세계와 정토를 구별하는 경계였을 미륵사지의 연못은 그대로 얼어붙어 마치 별세계와 같습니다. 얼음 아래 잠든 물은 여전히 중생들이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을 일구기를 여전히 기다리는 듯합니다.
절터 경내로 들어서면 거대한 두 개의 탑이 흰 눈밭에서 반사된 빛에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탑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산새 소리와 함께 간간이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깨웁니다.
미륵사 창건은 무왕의 익산 경영에서 핵심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향하던 중 용화산(미륵산) 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부인의 청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을 세웠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집니다.
백제의 기술자와 석공들은 이 전설을 현실로 옮겼습니다. 중앙에는 대형 목탑을 세우고, 양옆에는 인근 황등면에서 캔 화강암으로 목탑의 세세한 양식을 그대로 본뜬 석탑을 세웠습니다. '목탑을 영원불멸의 돌로 지으려 했던 이 파괴적인 혁신'에서 비로소 한국 석탑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석탑의 높이는 상륜부까지 포함해 약 26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명실상부 국내는 물론 동양 최대 규모입니다.
세월의 풍파 속에 목탑은 스러져 거대한 주춧돌만 눈이불에 덮여 있고, 동탑 역시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직 서탑(국보 제11호)만이 반파된 채 그 자리를 지켜오다, 20여 년에 걸친 끈질긴 보수 정비 끝에 2019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섰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덧씌워졌던 6층 높이의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치과용 드릴로 말 그대로 '한 점씩' 떼어내며 백제 석공의 숨결을 찾아낸 20년의 세월.
그 지루하고도 경건한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백제 석공이 짜놓은 본래의 석조 뼈대를 기적처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완전한 9층의 모습은 아니지만, 재현된 문화재로서는 완벽한 위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탑 모서리에 서서 위를 올려다봅니다. 짙푸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옥개석의 끝부분이 마치 목조 건물의 처마처럼 슬쩍 들려 있습니다. 석재의 질감 속에서 목탑의 부드럽고 유려한 자태가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이 석탑의 각 모서리에는 수호석인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3명만 남았는데, 말이 수호석인이지 작고 앙증맞은 모습이 마치 동자처럼 느껴집니다. 하얀 '설의(雪衣)'를 입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합니다.
지난 2009년 서탑 해체 당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가 639년, 무왕 후반기에 창건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창건의 주체입니다. 사리봉안기에는 창건의 주역이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고 또렷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껏 무왕의 비는 신라 선화공주요, 그 선화공주가 창건에 힘을 실어준 곳이라는 추측이 많았는데 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난 셈이지요.
선화공주의 애틋한 전설이 흐르는 가운데, 아직 정확한 진실은 여전히 눈 덮인 이 절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미륵사의 세 금당 중 하나는 선화의 소망을, 다른 하나는 사택왕후의 권위를 담아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요.
전쟁이 잦았던 삼국 말기, 미륵신앙은 고단한 중생들 사이에서 대유행했습니다. 특히 불교 교리에 밝았던 백제에서 이는 더욱 성행했는데, 신라의 고승조차 백제 땅에 미륵의 화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미륵은 미래의 부처입니다. '용의 아들'이자 '서동요'의 주인공인 무왕은 자신을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자 내세의 구원자로 투사했습니다.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이 거대한 호국 사찰을 지어 국론을 통합하고, 자신이 곧 이 땅에 미륵의 세계를 구현할 주인임을 대내외에 공포했던 것입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미륵사지 발굴 조사에서는 매우 특이한 구조가 발견됐습니다. 각 석탑과 목탑 뒤에 조성된 금당 바닥 아래에 지하 공간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는 한국 건축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로,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는 종교적 장치로 풀이됩니다.
유일한 유사 사례인 신라 감은사지의 경우,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아래 지하 공간을 만든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무왕에게 대입해 보면 흥미로운 가설이 성립합니다. 스스로 '용의 후손'임을 강조했던 무왕은 죽어서도 용이자 미륵이 되어 이곳을 드나들며 설법함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백제 금동대향로나 무령왕릉 은잔에 새겨진 용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고대인들에게 용은 지하와 물과 관련된 수신(水神)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고대 한반도에서 성행했던 용에 대한 신앙이 이 금당 지하에 남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륵사는 백제는 물론 통일신라와 고려, 심지어 조선 중후반대까지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미륵신앙도 백제 멸망 후에도 통일신라와 고려 초까지 면면히 이어졌지요. 지금도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지역민들의 성소이자 종교적인 안식처입니다.
마침 인적이 드문 아침의 미륵사지를 찾아 동탑 앞에서 정성스레 기도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1992년 복원 당시 "지나치게 새것 같다"며 비판받았던 동탑은 어느새 세월의 옷을 입고 자연스레 미륵사지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여인이 정성스레 탑을 향해 올리는 경배의 모습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변해 세상에 내려왔다던 미륵이 잠시 오간 것이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상상마저 하게 됩니다.
미륵사는 단순한 호국 사찰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무왕은 익산(지모밀지)에 천도를 도모하며 자신만의 불국정토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 야망의 이면에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무왕의 여인들에 얽힌 서사와, 왜 하필 익산이 백제의 마지막 종착지로 낙점되었는지에 대한 거대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 비밀의 실타래를 더 깊이 풀어보기 위해, 바로 옆 국립익산박물관과 무왕의 숨결이 서린 왕궁리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