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정은 미륵사지 서탑의 깊은 심장부에서 시작됩니다. 눈에 덮인 서탑을 뒤로하고, 미륵사지 경내에 자리 잡은 국립익산박물관으로 향합니다.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 복원 과정 중 탑의 심초석 안에서 찬란한 사리장엄구가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금동 사리외호와 순금의 내호 표면을 가득 채운 정교한 연꽃무늬와 인동초 문양은 금동대향로와 함께 정점에 오른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특히 0.1mm의 미세한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누금 기법은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기술 수준으로 평가받고요.
경이로운 사리함의 실물은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직접 마주할 수 있습니다.
사리함의 발견은 미술사적으로도 눈부신 성취이지만, 우리가 알던 ‘서동요 설화’와 실제 역사 속 ‘무왕’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울 결정적 증거이자 중요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리함과 함께 발견된 금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고고학적 의의는 가히 파괴적이라 할 만합니다.
봉영기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 주체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대귀족 사택 씨 가문의 딸인 ‘사택왕후(沙宅王后)’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봉영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가슴속에 선근을 쌓아 올리시어"라는 표현이 선명합니다.
서동요의 낭만적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역사의 안개 저편으로 숨어들었지요. 가끔은 더 많은 사실이 모든 것을 다시 미궁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무왕의 왕비 가문으로 언급된 사택 씨는 어떤 가문이었을까요? 이들은 사비를 기반으로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독식하다시피 한 대성8족 중 으뜸 귀족이었습니다. 639년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왕후의 부친 사택적덕과, 654년 부여에 ‘사택지적비’를 세워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했던 대좌평 사택지적의 이름이 그 가문의 서슬 퍼런 위세를 증명합니다.
무왕이 설화처럼 용의 자식이었건, 혹은 마를 팔던 소년이었건 확실한 점은 그가 원래는 백제 중앙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변방의 세력이 백제 최고의 귀족 가문과 혼인을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서동요만큼이나 드라마틱합니다.
그러면 익산에 기반을 둔 무왕이 어떻게 중앙 세력과 결탁해 왕좌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 배경에는 성왕의 전사 이후 무너진 한반도의 세력 균형이 있습니다. 562년 백제의 동맹이었던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며 가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낙동강을 장악한 신라는 백제로의 서진을 거침없이 몰아붙였습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정학적 가치가 급상승한 곳이 바로 전북 일대와 익산이었습니다.
익산은 5세기 중반, 한성백제 시기부터 이미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수촌리를 다룬 글에서 언급했듯 백제 왕실이 하사한 금동관모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거든요. 백제 특유의 ‘횡구식 석실묘(앞트기식 돌방무덤)’가 늘어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특히 1986년 발견된 입점리 고분군은 금강 하류를 조망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고분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관모는 익산 세력이 일찍부터 백제 왕실과 긴밀히 소통하며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진 전북 및 익산 세력을 중앙 권력으로 포섭하는 것은 백제 지배층의 절실한 과제였을 것입니다. 이를 시사하는 흥미로운 유물이 바로 능산리 사지에서 나온 ‘육부오방명(六阝五方銘) 목간’입니다.
이는 백제의 행정 체계가 기존 5부에서 6부로 개편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익산 세력을 중앙 왕실 체제 안으로 편입한 흔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결국 무왕은 익산 세력과 백제 왕실이 결합해 낳은 자손으로, 익산 세력의 대표자였을 것입니다. 중앙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익산 귀족들과 익산 세력을 끌어들이고 싶었던 백제 기득권층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결과가 무왕의 즉위였겠지요.
왕위에 오른 무왕은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키우고자 익산을 근거지로 삼아 현재적 의미로는 ‘행정 수도 이전’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 야심 찬 프로젝트의 정신적 정점이 미륵사지였다면, 제석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그 천도 경영의 실무를 담당한 흔적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눈 덮인 왕궁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설원 위로 옛 백제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사라진 건물들의 기단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눈 속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 위로 왕궁리 오 층 석탑(국보 제289호)이 낮게 깔린 구름을 뒤로하고 몽환적인 자태로 솟아 있어, 마치 구름 속에 걸린 탑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탑은 석탑 내 사리장엄구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탑의 전체적인 비례와 옥개석의 표현은 백제 목탑의 전통을 완벽하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탑신 곳곳에는 과거 화마를 겪은 듯한 그슬린 흔적이 남아 세월의 풍파를 증언합니다.
탑 바로 옆에 위치한 익산왕궁박물관에서 이 유적의 비밀에 더 다가가 보겠습니다.
익산은 사실상 무왕기 백제의 ‘별도(別都, 부수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비 관북리 등 왕궁에서만 발견되는 ‘수부(首府)’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여기에 왕궁 수준의 장대한 축대와 담장, 그리고 화려한 수로와 괴석이 어우러진 정원 유적은 이곳이 단순한 별궁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특히 학자들 중에는 이곳의 정원 시설을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남지의 원형이나 궁남지 그 자체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위용 넘치는 5층 석탑이 들어선 것으로 보아, 백제 말기나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왕궁에서 사찰로 그 성격이 변모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궁리가 별도였다면 인근의 제석사는 바로 왕실의 안녕을 비는 백제 왕실의 원찰이었습니다. 7세기 중국의 문헌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익산)로 천도하여 제석정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선명히 남아 있는데, 당시 익산이 실질적인 백제 정치의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합니다.
무왕은 자신의 뿌리인 전북 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국력을 결집했습니다. 관산성의 비극을 극복하고 신라를 압박하며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익산이라는 새로운 기반과 중앙 권력을 하나로 묶어낸 무왕의 정치적 리더십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꿈은 무왕의 죽음과 함께 동력을 잃었습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궁리는 쌍릉에 잠든 그와 왕후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바뀌었고, 익산 천도의 원대한 이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왕의 아들은 전쟁을 통한 신라 압박이라는 아버지의 노선을 이어갔지만, 아버지처럼 독자적 지방 세력을 구축하기보다는 결국 다시 사비 귀족의 기득권 체제에 합류하는 타협을 택했습니다.
그가 바로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입니다. 타협은 결국 통치의 폭을 좁히는 독이 되었습니다. 뒤늦게 힘으로 귀족을 제압하지만, 급변한 국제정세로 인해 이는 오히려 왕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악수가 되었지요.
귀족층의 이반 징조가 나타나던 상황에서 아버지 무왕이 중국 수, 당제국에 보여줬던 유연한 외교 행보는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국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최중요 요충지인 대야성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으나,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지속 가능한 성공모델이 될 수는 없었지요.
막다른 끝에서 진행된 왕권 강화 노력과 강대강의 외교 노선은 팽창을 노리던 중국 통일제국과 이를 이용해 한반도 유일 패권을 도모하려던 신라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지요.
운명의 660년, 13만 당군이 서해안에 상륙하고, 신라군 5만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마지막 결사대를 꺾고 사비성으로 질풍노도같이 몰려올 때 의자왕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 먼 조상 백제 문주왕이 그랬던 것처럼 천혜의 요새, 웅진성으로 도피합니다. 그러나 기회의 땅 웅진은 이번에는 백제를 외면했습니다. 웅진성주 예식진(禰寔進)이 왕을 결박해 성문을 열었고, 그것으로 700년 백제 사직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의 묘지명은 그가 당나라의 대장군으로 호의호식하다 사망했음을 알려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남겼던 묘비가 이제는 대대손손 그의 더러운 이름을 기억하게 하겠지요.
부흥운동으로 백제 산하에 이름 모를 청춘의 피가 수도 없이 뿌려졌음에도 백제의 사직은 결국 끝을 맺었고, 무왕과 백제의 정치적 이상은 이렇게 종극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남긴 진정한 유산의 여정은 아직 끝을 맺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백제인들이 남긴 마지막 이야기를 충북 청주에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