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백제] 에필로그: 남겨진 자들의 봄

신봉동의 무명 전사들과 유민들의 천(千)불비상 앞에서

by whiteshore

익산 설원에 옛 백제의 이상을 남겨두고, 이제 '마지막 백제인'들의 흔적을 찾아 청주로 향합니다.


충북 청주는 공주나 부여처럼 백제의 잔향이 짙게 남은 고도는 아닙니다. 다만 백제라는 거목이 사라진 후, 남은 자들이 상흔을 어떻게 치유했는지 그 단서를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상실과 기억,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땅으로 가봅니다.


'백제 현충원', 전몰자 묻힌 백제 '최대 무덤 떼’


청주는 삼국시대 당시 수시로 국경이 변화했던 변방에 가까운 지역이었습니다. 자연히 전쟁이 잦았던 고장이기도 했지요. 그만큼 상실이 만연하고, 또 익숙했던 장소였을지 모릅니다.


흥덕구 신봉동, 청주 일반산업단지 인근에는 야트막한 동네 야산(명심산)이 하나 있습니다. 자세히 둘러보지 않으면 이곳에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3472595783935466576.jfif 청주백제유물전시관


봉긋한 봉분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전시관의 이름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입니다. 전시관이 명심산 외딴 자락에 위치하게 된 사연을 문화해설사가 친절히 들려줍니다.


명심산 자락은 예로부터 옛 무덤이 많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이 지역에서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80년대 후반, 산자락을 오가던 주민들의 신고 전화가 관공서에 빗발쳤습니다. 주민들이 산등성이 곳곳에서 부서진 토기 파편이나 구덩이를 계속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3472595783940948304.jfif 신봉동 고분군의 실제 돌널무덤


버려진 오래된 무덤이 있다는 소문에 값나가는 금붙이나 고려자기를 기대한 도굴꾼들이 들끓었습니다. 결국 시청과 충북대학교가 나서 일대를 발굴하기로 결정했고, 7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2001년, 발굴 성과를 집대성해 전시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신봉동 고분군에서는 백제 시대 무덤 370여 기가 확인되었습니다. 대부분 땅을 파서 만든 토광묘 320기였고, 돌방무덤인 석실분도 3기 발견되었습니다. 단일 유적으로는 백제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습니다.


3472595783940254032.jfif 신봉동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는 명심산 자락


아직도 이 일대 산책로를 걷다 보면 발밑에서 땅 아래 빈 공간이 울리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토기 파편이 발에 밟히기도 하고요.


조사된 고분은 107기 정도인데, 토기와 장신구 같은 일반 유물 외에도 철칼이나 도끼, 기병이 쓰던 말갖춤과 철갑 등 무구류가 다수 출토된 것이 특징입니다. 출토된 철기만 무려 1300점에 이릅니다.


3472595783937515600.jfif 고분군에서 발견된 판갑옷. 신봉동에 묻힌 전사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한반도 중원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을 벌이던 당시, 최전선을 사수하던 기마 전사집단의 공동묘지가 이곳이라고 추정합니다. 특정 계층의 무덤이 집단으로 조성된 경우는 많지만, 전사나 군인의 무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곳은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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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말기, 남진 정책을 펴던 고구려군이 백제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우회로로 주목한 곳이 청주 일대였습니다. 이곳에서 백제 무사 집단과 고구려군 사이에 혈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신봉동 고분은 200여 년 세월에 걸쳐 축조된 공동무덤입니다. 1500년 전 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백제 장졸들이 적지 않게 묻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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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전사가 묻힌 신봉동의 이야기는 정작 역사 기록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훗날 백제의 부흥은 여기, 기록되지 않은 신봉동 무명 전사들의 희생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시관에는 출토 유물을 근거로 재현한 백제 기마병과 보병의 모습, 이들이 무덤을 축조하는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3472595783940189264.jfif 신봉동 고분군에 묻혔을 백제의 기마전사를 복원한 모습.


청주의 무사 집단은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상당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특수한 상황과 목적으로 결속된 만큼, 전몰자에 대한 추모의 필요성도 컸고, 이를 기억하는 방식도 그만큼 특별했던 것입니다.


구성원의 희생을 기억하고 전승하기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만드는 것, 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도 '성과 속'의 장소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참담한 이별에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고 나서야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죽음과 가까이 살았던 이들의 땅에 이런 무덤들이 등장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1000분의 부처께 명복을 빌다, 계유명 비불


모든 희생에 정당한 대가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상실에 반드시 합당한 인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백제 멸망의 순간처럼 말입니다.


5세기 청주의 백제 기병들은 모국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지만, 200년 후 이들의 후손에게는 지킬 나라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죽음'은 백제인들에게 미증유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소속감이 대체되고, 기존 사회가 해체되었으며, 이웃이 죽고 혈육이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했겠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곧 무언가와 결별하는 과정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누구도 언젠가 다가올 상실의 순간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아름답게 떠나보내고 상흔을 추스르느냐가 남은 자들의 과제입니다.


백제 유민들이 부모와 가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각한 1000분의 부처는 어쩌면 이런 흔적일지 모릅니다.


3472595783941099600.jfif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에는 충남 세종시 일대에서만 발견된 아주 특이한 불비상(佛碑像)들이 별도 전시공간에 모셔져 있습니다. 불비상은 비석 형태의 돌에 불상과 기록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례가 매우 드문 형태입니다.


1960년과 1961년, 세종시와 공주시의 암자와 절에서 이 같은 불비상 7구가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비불에 적힌 연대를 통해 이들이 서기 673년부터 689년까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망한 것이 서기 660년이니, 부흥 운동을 고려하면 사실상 백제 멸망 직후 만들어진 것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수법이나 양식이 비슷하고 제작 시점도 유사해 동일 집단이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비불에는 조성 주체가 백제 유민이라고 직접 적혀 있습니다. '전씨(全氏)'나 '진씨(眞氏)' 같은 백제계 성씨, 그리고 신라 관등과 더불어 백제 관직명이 적혀 있다는 점을 보면 백제 유민 집단이 조성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2점의 국보를 포함해 제작 시점이 명시된 불상 4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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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비불이 바로 '계유명 삼존천불비상'입니다. 돌 앞면에는 서산마애삼존불 등 백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이 조각되어 있고, 지붕과 몸돌에는 조그만 부처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20260207_121523.jpg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말 그대로 천불의 비상입니다. 세월에 부처의 얼굴은 모두 마멸되고 깨져나갔지만, 그래도 확인 가능한 부처의 조각이 900여 구에 이릅니다.


20260207_121725.jpg '계유명 삼존천불비상'에는 900여구가 넘는 작은 불상이 빼곡이 새겨져 있다.


하단에는 계유년(673년) 4월 15일, 미차내에 있는 진씨를 비롯한 향도 250명이 국왕과 칠세부모와 중생을 위하여 석가 부처 등 다양한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국왕은 신라의 왕이 아닌 백제의 왕들을 가리킵니다. 사라진 백제의 왕과 세상을 떠난 부모, 그리고 백제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입니다. 나라가 망했음에도 백제 관직으로 자신들을 칭하면서 말입니다.


20260207_121407.jpg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같은 연도에 만들어진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의 관직명은 물론 백제 성씨인 전씨(全氏)가 백제의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사망한 부모를 위해 조성한 불비상입니다. 1000개의 부처 대신 앞면에는 앉아서 설법하는 아미타 부처가, 양 옆면에는 용 위에서 4존의 기락천이 천상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20260207_121433.jpg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이후 689년 만들어지는 두 구의 기축년 불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계에서는 이들 불상이 '미타 신앙'에 기반해 만들어졌다고 추정합니다. 미타 신앙은 서방극락세계에 머문다는 아미타불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사후 괴로움이 없는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대승불교의 신앙입니다.


20260207_121238.jpg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전쟁과 죽음으로 얼룩진 7세기 백제 땅에서 이런 미타 신앙이 단기적으로 대유행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미타 신앙은 전쟁과 질병, 기근 등으로 인한 죽음 뒤에 항상 유행하는 경향이 있지요. 비불을 만든 진씨와 전씨 일족 역시 숱한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상실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흑회색의 옥돌에 1000명의 부처와 천상의 천인, 그리고 극락정토로 죽은 이들을 이끌 아미타부처를 정성스레 새기는 것만이 상실의 고통을 마주 보고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릅니다.


20260207_121900.jpg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한을 통합한 신라 왕조에서 백제 유민들의 정치적 결속감은 차츰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후 신라 말기 후백제의 건국과 고려조 백제부흥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었지만, 그 후로 백제가 한국사에서 정치의 주체로 이름을 올리는 일은 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문화적 정체성과 소프트웨어는 한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에 깊게 자리 잡아 그곳의 문화적 DNA가 되었습니다. 백제 문화는 통일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의 근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유민 의식이 사라진 고려시대에는 백제계 석탑 등으로 계승되어 한국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은 나라 야마토는 백제가 존속했을 때는 물론 멸망 후에도 백제인들로부터 종교와 체제, 문화와 기술을 대량으로 흡수해 고대국가 '일본'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한강과 금강에서 무르익은 백제 문화는 망국의 동토(凍土) 속에서 한반도와 열도에서 화려하게 개화했습니다. 백제인들은 상실의 터널 속에서도 끝내 꽃을 피웠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폐허가 아니라 문명의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백제인과 그들의 후손이 남긴 더 많은 이야기는 저 바다 건너 어느 봄날에 조만간 다시 들려줄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견뎌온 이 겨울도, 반드시 당신만의 봄을 알려줄 싹을 품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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