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아래, 부여의 가을이 깊어갑니다.
관북리의 옛 왕도와 이어진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다 보면, 백제 미학의 꼿꼿한 자존심인 정림사지에 닿게 됩니다.
정림사의 전성기는 비록 짧았으나, 낮은 담과 붉은 단풍에 둘러싸인 석탑은 천수백 년을 살아남아 백제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 강변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발길을 붙잡는 것은 역시나 5층의 석탑입니다.
광활한 절터의 중심,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석탑은 목조 건축 특유의 부드러움을 돌이라는 재료로 구현해 낸 신비로운 조형물입니다.
한국의 석탑은 백제 땅에서 시작되었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익산의 미륵사지처럼 목탑의 모습 자체를 그대로 돌로 구현하려 했고요.
이어 목조 건물의 유려함은 유지하면서도 목탑의 형태에서는 과감히 벗어나 석탑의 양식을 제시한 것이 정림사의 5층탑입니다.
즉 한국의 석탑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1500년간 다양한 변형은 거쳤으나, 기본적인 전형은 이미 백제 시대에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한국 석탑의 역사는 백제 석탑의 ‘각주’인 셈이죠.
얇은 지붕돌의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가을 하늘로 날아오를 듯 경쾌하지만, 또 전체적인 비례와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안정적입니다.
'민흘림(Entasis)' 기법 덕분입니다. 기둥의 가운데를 살짝 배부르게 만들고 상단으로 갈수록 좁게 만들어, 멀리서 보았을 때 기둥이 안쪽으로 굽어 보이지 않게 설계한 것이죠.
목조 건축의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돌을 마치 나무처럼 가공한 백제 석공들의 기술력과 치밀한 설계가 돋보입니다.
이 아름다운 탑의 1층 탑신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碑銘)'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자신의 공적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때로는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사비 도성 내에 있던 많은 절과 탑들은 불살라졌지만 당군이 승전 기념비처럼 활용한 이 글귀 때문에 정림사의 탑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치욕을 새긴 채 살아남은 정립사의 석탑은, 역설적으로 칼끝이 결코 아름다움은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목격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웅진도독부를 호령했던 소정방 따위의 이름은 희미해졌지만, 정림사 석탑의 아름다움은 침략자들의 허명(虛名)보다 문화의 힘이 훨씬 강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지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이 자리에서 여실히 증명하겠지요.
정림사는 백제 이후 부침을 거듭하며 부여의 역사와 함께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절은 백제 멸망 후 오랫동안 그 이름이 잊혔습니다. 그러다 1942년 발굴 조사 중 '태평팔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고 적힌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드디어 '정림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지요.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시기로, 백제가 멸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뒤 고려 때 이곳을 중건하고 '정림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때의 흔적은 정림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정림사지 석탑 뒤편 강당 안에는 거대한 석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외관은 굉장히 이질적입니다. 불상의 몸체는 마치 녹아내린 듯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고요. 그 위에는 투박한 모양의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불상 몸체의 마모는 고려 시대 이후 어느 시점에 정림사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입은 화상의 흔적입니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겉면이 박락(剝落)되었고, 그 위로 후대 사람들이 다시 머리와 어깨를 보수하여 지금의 독특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백제는 정림사를 통해 백제가 부처의 가호 아래 있는 평화롭고 격조 높은 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습니다.
‘1 탑 1 금당’과 이를 둘러싼 회랑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 표현했고요. 동시에 공간을 정갈하고 넓게 보이게 하는 기능적 배치도 선보였지요.
백제가 꿈꾼 '성대(盛代)'가 무력의 강함이 아닌, '미(美)적 조화'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백제 당시 정림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면 발아래도 함께 주목해야 합니다.
탑과 강당의 양옆에는 기와를 올려서 쌓은 단이 줄지어 있습니다. 과거 정림사의 회랑과 건물들이 있던 곳입니다.
특이한 점은 건물의 기단이 바로 기왓장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보통 건물의 상층부를 장식하는 기와를 건물 기단의 재료로 활용한 특이한 사례입니다.
배수 문제를 해결하고 견고함을 살리면서도, 기와 끝의 곡선이 주는 리듬감을 지면에 부여한 미적 장치이죠.
독특한 백제만의 이 기술은 백제 기술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시텐노지(四天王寺) 등의 일본 열도의 고찰들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니 정림사지 마당을 걷는 것은 사실 고대 동아시아 건축 기술의 발원지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가을바람을 잠시 피하러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찾아갑니다. 지난 2006년에서야 개관한 박물관입니다. 정림사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을 모아놓았습니다.
마침 휴일에 내려간 터라 관광객이 제법 있습니다. 일본에서 온 학생들이 특히 많이 보입니다. 인솔하는 교사들도 디스플레이 창을 이리저리 누르며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는 모습입니다. 일본인 학생 하나가 유리창 너머의 소조상 파편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정림사지에서는 다양한 ‘백제의 얼굴’들이 출토됐습니다. 주로 진흙으로 빚어낸 소조상들로,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부처와 보살들의 모습들입니다. 박물관 내 ‘인피니티룸’에서 이런 소조상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흙으로 빚은 인형들은 비록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 부드러운 미소와 섬세한 옷주름만큼은 생생합니다.
그 학생은 소조상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마도 1400년 전 자신의 조상들도 공유했을 백제의 미학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국경과 세월을 넘은 정서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문화의 힘이겠지요.
어느덧 가을 오후가 찾아온 석탑 뒤편에서 국화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고,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된 강당 건물 안으로는 긴 노을빛이 스며듭니다.
백제 때의 화려한 금단청이나 거대한 치미를 얹은 웅장한 지붕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빈터에 남은 주춧돌과 석탑 하나만으로도 정림사의 존재감은 충만합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을 실현해 이웃 나라에 전파하고, 인내와 회복력으로 이를 지켜온 정신을 여전히 느낄 수 있거든요.
백제인들의 꿈이 어린 이곳에서, 우리 현대인들이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품격의 탑을 마음속에 다시 세워보시고 가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