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에서 개화해 여름의 열기를 이겨낸 백제문화는 마침내 사비 땅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며 자신감을 회복한 백제는, 축적된 문화적 토양을 토대로 자신만의 고유한 풍류와 멋을 완성합니다.
사비의 사람들은 현실 초극(超克)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다움을 다듬고 색을 입혀 백제라는 브랜드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지요.
세상의 잣대가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의 터전을 일궈나간다는 것이 언감생심인 시대입니다.
모두가 그저 삶의 무게를 버텨내기에 급급하지요.
하지만 언젠가 고통은 무뎌지고 그 틈에서 다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힘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일구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볼 만한 일임을 사비 시대의 기와 한 장, 벽돌 하나가 부여에서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마강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향합니다. 백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이요, 찬란한 백제 문화가 숨을 고르고 있는 곳입니다.
부여에서 첫 번째로 방문할 곳은 관북리 유적입니다.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곧장 북쪽으로 ‘사비로’를 달리면 세계문화유산 관북리 유적을 표시한 표지판이 보입니다.
십여 년 전에는 시외버스터미널 앞에는 항상 군밤을 파는 할머니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행상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유적지를 정비한 영향인 듯한데 더욱 적막한 곳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사비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성왕 로터리’에는 백제 26대 국왕인 성왕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왕은 어좌에 앉아 근엄하게 옛 사비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지요.
공주시가 무령왕의 도시였다면, 부여군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성왕의 고장입니다.
무령왕의 아들로 공산성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성왕은 재위 16년에 백제의 서울을 웅진에서 이곳 소부리, 즉 사비로 옮깁니다.
로터리를 따라 이동하면 등장하는 관북리가 바로 백제 사비성의 중심인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에는 유적 앞으로 상가와 상인들이 북적였으나, 지금은 각 유구가 정갈하게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여느 백제 유적들이 그러하듯 현재는 부소산을 뒤로한 채 드넓은 평지만이 펼쳐져, 화려했던 백제 때의 성세를 바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북리 일대를 여기저기 걷다 보면, 숨길 수 없는 과거의 위용이 절로 드러나지요.
대형 전각지가 대표적입니다. 좌우가 7칸에 상하가 4칸의 건물이 있던 곳입니다. 전각의 크기가 동서 35m, 남북 폭은 20여 m에 달합니다.
이 정도면 조선시대 경복궁의 근정전(가로 30m, 세로 약 21m)보다도 큰 규모로, 고대 한반도에서도 거대한 건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특히 주춧돌 밑에 까는 적심만 35개인 것으로 추정돼 상당히 위상이 높은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당 전각의 복원도는 유적 앞 그림으로만 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를 모티브로 한 복원 건물이 부여에 있어 이를 토대로 사비 시대의 번영을 눈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대형 전각 건물 뒤 편으로는 주춧돌이 여러 개 남아있는 또 다른 건물터와 함께 기와를 깐 시설(부와 시설)도 나옵니다. 부와 시설은 기왓장 수천 장을 모래와 섞어 바닥에 깔아 둔 것으로 습기를 제거하는 일종의 ‘제습’ 시설이었다고 합니다.
백제는 기와의 나라입니다. 대형 절터에서 발견되는 백제의 미려한 치미와 삼국 중 가장 우아한 연꽃 수막새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백제인들은 기와 수백, 수천장을 건물의 바닥을 까는 자재로 이용할 정도로 기와를 체계적으로, 또 대량생산했습니다.
기와를 만드는 전문 공장의 흔적은 부여에서만 쌍북리와 정암리 등의 지역에서 다수 발견됩니다.
기술자들을 우대한 나라답게 기와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와박사'들도, 지금으로 치면 '기술 고위 관료'로 상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부와 시설 외에도 기와를 건물의 기단으로 삼는 ‘와적 건물’ 역시 대표적인 백제 고유의 건축 기법입니다. 정림사지 등 백제의 핵심 유적지에서는 이런 흔적이 흔히 발견되지요.
이런 위대한 장인들의 자취는 관북리 유적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적지에는 공방과 창고 시설의 흔적이 다수 남아있거든요.
당연히 관북리 일대와 부소산성에서는 백제의 영화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품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부소산성에는 주인인 불상을 없어진 채 금동 광배가 발견됐습니다. 광배는 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문양이나 그 기법이 세련된 모습입니다. 이런 백제 왕실의 공예품들은 바로 여기 관북리의 공방에서 제작돼 왕실에 바쳐졌을 것입니다.
관북리는 조선시대 때는 객사나 동헌 등 부여현의 관아 시설이 있던 곳입니다. 아마 백제 왕궁이 있던 곳이라 멸망 후에도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이 계속해서 시대를 바꿔가며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원된 동헌 건물이나 객사는 비교적 그 모습이 잘 남아있어, 관북리 유적과는 또 다른 가을 정취를 풍깁니다.
앞에는 이곳이 백제 왕궁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몇 가지 흔적들이 더 있습니다. 하나는 연지입니다. 공산성도 그렇고 미륵사나 정림사도 그렇고, 백제와 관련된 유적에는 반드시 연못이 있습니다.
조경 등 기능적인 이유 이상으로 종교적인 이유도 컸을 것입니다. 불교적 이상을 상징하는 연꽃을 피워내던 곳이니까요. 인공적인 연못과 함께 연꽃을 키워내던 거대한 석조도 이곳 왕궁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관북리에도 백제 때 연못으로 추정되는 연지가 있습니다. 연지에서는 당시 백제인들이 연못에 빠뜨리고는 찾지 못한 물건 등이 많이 나왔지요. 개중에는 개원통보 같은 당나라 때의 동전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대의 ‘동전 던지기’ 풍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아울러 부여 동헌 앞에서는 백제 때 왕궁에서 시가지를 연결했던 도로 유적이 나왔습니다. 도로의 폭은 10~11m, 길이는 일단 발견된 부분만 40m쯤 됩니다.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덮개가 있는 배수로 시설도 발견됐는데, 현재는 사비 시대의 도로와 함께 배수로도 재현을 해뒀습니다.
궁궐에서 시작된 도로는 사비 도읍 중앙을 가로질러 정림사를 거쳐 궁남지 일대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백제 때 도로 앞에 현대의 좁은 아스팔트 도로가 이어져 있습니다. 현재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백제 정림사지로 이동할 수 있지요.
사비성은 정교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왕궁을 중심으로 '주작대로'의 개념인 중앙의 대로가 펼쳐졌고, 각 도로망이 바둑판처럼 구획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구나 동처럼 행정구역을 표기한 표지석이나 기와 역시 부여군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사비는 5개의 부, 또 각 부 밑으로는 5개의 항이라는 하위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계획도시의 면모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배수 시설의 존재입니다.
관북리에서는 단순한 배수로뿐만 아니라 지하에서는 상수도관과 침전물을 거르던 목곽수조도 발견됐습니다. 왕궁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집 앞에도 배수로 등 하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북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도 동아시아 건축과 도시 구조 발전의 중요 사례로 꼽혀서입니다.
세련된 도시 설계는 행정 효율로 이어집니다.
사비의 도시 구조나 행정 체계는 오늘날로 치자면 효율적 도시계획과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한 것으로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도시계획과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설계는 백제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밟아나가는 데 큰 발판으로 작용했던 것이죠.
오늘날 부여에는 관북리의 백제 왕궁을 그나마 유사하게 재현해 놓은 장소가 있습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백제문화단지’입니다.
고증에 대한 논란이 다소 있었음에도 사비시대의 대형 전각이나 건물을 생생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관북리 일대를 재현한 ‘사비궁’과 부여 왕릉원에 있는 ‘능사’, 그리고 가마터 등 사비시대의 주요 건물과 관청, 저자도 재현해 뒀지요.
단지 내에 있는 백제역사문화관도 다양한 복원유물과 레플리카를 마련해 뒀기 때문에 둘러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 지자체나 주민에게도 좋은 것이겠지만, 한 가지 우려는 있습니다.
자칫 부여 시내에 있는 유적에 대한 무관심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입니다. 진짜 백제는 결국 실존하는 유적지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토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제문화단지는 백제 시대 국가유산에 대한 연장 선상이라기보다는, 192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관광지로서의 부여의 정체성과 더 맞닿아 있는 장소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문화단지가 가진 긍정적 힘은 여전히 큽니다. 무엇보다 백제가 더 이상 망국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지역주민들에 따르면 주로 일본인 등의 외국인들도 최근에 자주 찾는 곳이라 합니다. 과거에는 부여읍의 구시가지에서 진행되던 백제문화제 등의 지역 행사도 요즘에는 이곳에서 많이 개최됩니다.
물론 옛부터 지역민들과 문인들이 주요 전설이나 문학 소재로 삼아왔을 정도로, 백제사의 종막은 비장했습니다.
이런 정서 역시 부여의 중요한 정체성이겠으나,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실체가 있는 '살아있는 백제'의 모습을 되살리고, 조금이나마 관심을 되찾아왔다는 것은 분명 적잖은 성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