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산으로 오르기 전, 공주 답사의 하이라이트인 무령왕릉을 먼저 둘러보겠습니다. 1~4호분보다 후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만큼, 아래 송산의 서쪽 경사면에 조성돼 있습니다.
단순히 무덤 외관만 봐서는 그 유명세와 명성을 곧바로 체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령왕릉 역시 그 학술적 중요성과 보존 필요성에 따라 영구적으로 내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지요.
무령왕의 진면목을 알자면 국립공주박물관은 필수 코스입니다. 박물관의 설립 자체가 무령왕릉의 발굴 덕분이니 이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들겠지요.
“저기 어! 저 윤 기사! 윤홍로 씨 보고 연대표 가져오라고 해!”
유난히 무더웠던 1971년 7월 8일. 좁은 고분 입구에서 나온 발굴단이 다급히 현장기사를 찾습니다.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이 정체를 세상에 드러나기 직전의 순간입니다.
시간을 돌려 3일 전인 7월 5일. 왕릉원에서는 6호분 주변에 대한 정비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빗물이 벽화무덤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조성 공사였지요.
그런데 6호분 뒷부분 주변을 파 내려가던 인부들의 삽날에 ‘철커덕’ 소리와 함께 무언인가 단단한 게 걸립니다.
석회로 굳은 경토층을 젖혀낸 흙 속에서 드러난 것은 잡석이 아닌 검게 빛나는 벽돌들이었지요.
'심상찮은 발견'에 전보 하나가 당국에 긴급 보고됩니다. 지난 2021년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 50년’ 전시에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담은 전보문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사적 13호 송산리고분군 보수 공사 중 배수로 굴토 작업 중 5호 6호분 뒷면 중앙 약 3미터 지점에서 6호분과 성격이 같은 전축(전돌) 고분의 연도(길) 입구 부분이 발견되어 현장 보존 중인데 귀중한 유적인 만큼 시급히 조사 작업을 진행치 않으면 도굴 및 파괴의 우려가 있으니 긴급조치 바람."
이 짧은 전보에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7일 현장에 급파됩니다.
아직 무덤이 완전한 것인지, 아니 무덤이 맞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던 가운데 조심스레 굴토 작업이 진행됩니다.
벽돌로 촘촘히 쌓인 입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설마 하던 기대감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미도굴’ 왕릉급 무덤임이 확실해진 것입니다.
곧이어 특종 기사가 연이어 터졌고 흥분은 열병처럼 공주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발굴단과 현장 인력, 기자들은 물론 소식을 듣고 왕릉원에 찾아온 공주시민까지 수백 명이 좁은 봉토를 에워싸면서 아수라장이 연출됐지요.
그달 8일 조촐한 위령제 이후 1400년 만에 첫 방문객이 무덤 안으로 향했습니다. 잡초 잔뿌리가 무덤 입구를 가린 가운데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란히 놓인 직사각형 모양 돌판 2점과 동전 꾸러미, 그리고 성난 듯 웃는 듯한 얼굴로 발굴단을 노려보는 진묘수 조각이었습니다.
이윽고 발굴단은 흥분 속에서 현장에서 발견된 돌판, 즉 지석의 명문을 읽어 내려갑니다. 당시 현장 녹취는 국가유산청이 2025년 처음 공개한 바 있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계묘년 5월 병술사 7일 임진...”, “526년은 무슨 왕이야. 무령왕. 무령왕이야!”
지석의 연대표를 맞춰본 결과 해당 고분이 25대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이 마침내 드러난 것입니다. 1400년간 무덤 입구를 지켜온 진묘수가 그 소임을 마친 날이었습니다.
그러면 국립공주박물관에서 핵심 유물을 감상하며 무령왕의 생애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1개 전시실을 통으로 무령왕릉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52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 무려 17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무령왕릉에서 그러했듯 ‘웅진백제실’ 입구에서 입장객을 먼저 맞이하는 것은 진묘수입니다. 진묘수는 중국 진·한 시대부터 무덤에 부장 된 상상 속의 신수(神獸)입니다.
대륙의 진묘수가 기묘하고 섬뜩한 외형을 한 것과 달리,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동글동글한 몸뚱어리에 짧은 다리, 뭉툭한 주둥아리가 익살스럽습니다. 파수꾼으로의 위엄은 다소 떨어지지만, 미워할 수 없는 백제의 진묘수입니다.
진묘수 뒤편에는 왕과 왕비의 인적사항과 사망 및 매장 시점 등을 기록한 묘지석 2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무령왕 지석의 첫 구절은 ‘영동대장군’으로 시작됩니다. 어느 때보다 열린 외교를 지향하고, 안으로는 내실을 다져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올려놓은 무령왕의 치세가 압축된 단어입니다.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로 추정됩니다. 무령왕 역시 이복동생인 동성왕처럼 일본에서 체류하다, 문주왕 때 아버지와 백제로 돌아와 곤지를 보좌한 것으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곤지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장남 무령왕 대신 일본에 있던 둘째 아들 동성왕이 진 씨 가문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습니다.
무령왕릉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서기 462년에 태어났습니다. 소년 군주 삼근왕이 사망한 것이 479년이니 무령왕은 그 당시로는 이미 성인의 나이였다고 봐야지요.
아마 이 때문에 무령왕 대신 보다 귀족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어린 동성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무령왕은 20여 년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무령왕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동성왕이 살해되면서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이 즉위한 직후,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왕은 한솔(扞率) 벼슬을 맡고 있던 해명에게 토벌을 명하지요.
백가는 이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하나 왕은 즉시 백가를 처형했다고 합니다. 진압과정이 석연치 않기 때문에, 백가의 난과 무령왕 즉위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무령왕은 즉위 후 리더십의 첫 시험대였던 백가의 난을 성공적으로 평정합니다. 이후 무령왕 시대에는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귀족 세력의 별다른 반발 없이 안정적인 치세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대의 왕권 강화는 어떻게 이룩될 수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백가 토벌의 주체입니다. 해구 이후 축출됐던 해 씨 세력이 다시 중용된 것이지요. 한성 시기 사라졌던 우 씨 가문도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차례 기록에 등장합니다.
아울러 왕은 재위 기간 왕족들에 대한 대우 역시 강화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담로 제도’를 활용해 지방 각지에 왕실 일족 즉, '골족(骨族)'을 파견해 지방 재지세력을 견제한 것입니다.
이런 인사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무령왕이 왕족과 한성 출신 구 귀족을 포함한 '범(汎) 부여계'를 적극 중용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위 당시 무령왕의 나이는 이미 40세였습니다. 선대왕들의 잇단 죽음을 원숙한 나이의 무령왕은 여러 차례 목도했습니다. 왕 자신으로서도 인고의 세월이었겠지요.
그럼에도 무령왕은 배신으로 축출됐던 일부 구 귀족들에게도 다시 손을 내밀고, 한편으로는 위축된 왕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왕은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며 결정적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특히 동성왕의 실패를 분석한 무령왕은 구 귀족과 신흥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하기로 합니다.
웅진의 신흥 귀족 역시 일정 세력은 조정에 다시 귀속시키며, 신구세력 간 균형 유지를 팽팽히 유지해 안정적 집권에 성공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무령왕은 동성왕 등 이전 왕들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병권과 내정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정무적 판단과 정치적 감각은, 이른 나이에 구중궁궐에서 즉위했던 이전의 왕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20년간의 숱한 위기 속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또 조율하면서 다듬어간 무령왕만의 무기였겠지요.
무령왕 시기 왕권 회복을 표징 하는 유물이 왕의 큰 칼입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왕의 왼쪽 허리 부근에서 82cm 길이의 칼이 출토됐습니다. 원래 크기는 90c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용과 봉황 무늬로 장식된 호화로운 보도(寶刀)로, 무령왕이 실제로도 패용했을 것입니다.
1500년이 지났지만 칼의 손잡이에 있는 금실과 은실은 서로 교차하며 각각의 색을 아직도 형형하게 빛냅니다. 칼자루 끝 고리 부분에는 2마리의 용이 생동감 있게 서로의 몸통을 비틀고 있지요. 고리 아래에는 봉황 하나가 왕실의 부활을 상징하듯 그 날개를 힘껏 펴고 있습니다.
특히 손잡이의 고리 안에는 무령왕의 강력한 왕권을 대표하는 용의 머리가 우렁차게 포효합니다. 백제인의 독창적 미의식이 빛을 발한 대표 사례입니다.
그러나 무령왕의 치적은 왕권 강화에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무령왕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무령왕릉을 벗어나야 이해할 수 있지요. 남은 유물을 둘러보며 무령왕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