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한성(7)] 석촌 옛 무덤에 깃든 웅지

by whiteshore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몸 생김새가 기이하고 컸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풍납토성에서 몽촌토성은 지척의 거리입니다. 지척은 조금 과장이려나요. 아무튼 몽촌토성에 오르기 전에 앞서 풍납동 옆 석촌동에서 위대한 비전을 남겼던 왕을 만나보겠습니다.


서울시 송파구에는 서로는 석촌동에서 동으로 방이동까지 백제 시대의 고분들이 널리 펼쳐져 있습니다. 한성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왕족과 중앙 귀족들의 무덤들이죠.


3472594408705562192.jfif 서울 방이동 고분군 전경. 백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당시인 1917년 조사결과를 후대에 분석한 바에 따르면, 당시 석촌동에만 무려 290 여기의 무덤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이곳은 크고 작은 돌무덤들이 산재한 ‘석촌’이었던 것이죠.


국내에서 석촌동 고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은 약 60년이 흐른 1974년으로, 이미 전쟁과 도시화가 한차례 일대를 휩쓴 뒤였습니다.


현재 석촌동 내 고분은 고분공원에 단 8기만 정비되어 있습니다. 공원은 서울 지하철 8·9호선 석촌역과 9호선 석촌고분역 중간에 위치합니다. 고분군의 중앙 아래에 지하차도와 지하철이 지나고 있는 셈이죠.


입구에는 ‘서울 석촌동 고분군’이라는 이름이 선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듭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지역의 백제 왕릉군은 모두 각각 ‘공주 왕릉원’, ‘부여 왕릉원’, ‘익산 왕릉원’으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백제 유적이라는 연관성도 높이고, 직관성도 살리는 작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해봅니다.


3472594408787386960.jfif 석촌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인 3호분. 뒤로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도착한 공원은 빌라촌의 한가운데에 마치 외딴섬처럼 놓여 있습니다. 공원 경계에는 가로수가 조성돼 현대의 서울과 백제 때의 한성을 시공간적으로 단절시켜 주는 느낌이 듭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뺏는 건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3호분입니다. 고구려식 돌무지 형태입니다. 3단의 계단식 무덤으로 높이는 낮지만, 제일 밑단의 가로가 51m, 세로는 48m 규모의 대형 무덤입니다. 원래는 위로도 몇 개의 단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옛 고적조사 자료로 추정해 보건대 아파트 2~3층 정도의 높이는 되었을 겁니다.


3472594408784758352.jfif 석촌동 고분군 2호분.


크기는 훨씬 작지만 옆 4호분과 2호분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을 더욱 부자지간처럼 빼닮았습니다. 무덤 옆에 무덤의 돌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둔 호분석이 있는 점도 고구려 방식입니다. 이곳 공원 내에 있는 돌무지무덤은 총 5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에는 수막새 등 기와의 흔적이 많이 나옵니다. 아울러 제사에 이용됐던 굽다리 접시나 최고급 중국제 청자, 유리구슬, 금귀걸이 일부도 일부가 남아 이곳이 백제 왕실의 왕릉이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3472594408785497936.jfif 석촌동 고분군 4호분을 둘러싼 호분석.


석촌동에서 돌무지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 건 3세기 중엽입니다. 이 시기 임진강에서 사라진 돌무지무덤이 이곳 한성에서 고구려 양식과 더욱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 것이죠. 앞서 여러 차례 설명했듯 이 무덤들은 고구려계의 남하와 이들 주도의 백제 건국을 설명하는 근거로 흔히 활용됩니다.


그렇다고 이들 무덤이 고구려 무덤과 같은 것은 또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계 무덤과 외형만 고구려식인 무덤이 있습니다. 2호분은 기존 소규모 무덤들을, 4호분은 현지 선주민들의 기존 흙무덤인 분구묘를 외형만 다시 고구려식으로 바꾼 것이라는 게 조사로 드러났지요. 외형은 비슷하지만 독자적인 백제식 돌무지무덤 인 셈입니다.


3472594408823018576.jfif 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토기와 청자. 제의에서 사용된 유물들이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에서 촬영.


아무튼 먼저 있던 세력이 결국 고구려계에 동화되어 버리는 모습은 백제의 건국설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백제 건국설화에서 비류는 온조의 형으로 나오죠. 비류는 미추홀, 즉 지금의 서해 앞 인천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 한강의 온조 세력에 합쳐지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마침 고고학적으로는 임진강의 고구려계 세력이 한강 일대 토돈분구묘 세력을 흡수하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분구묘는 일반적으로 서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묘제로 알려져 있어 묘한 감을 줍니다.


결국 고구려계 이주민들과 한강에서 토돈분구묘를 만들던 선주민들이 점진적으로 연합해 세운 나라가 백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3472594408872386896.jfif 석촌동 돌무지무덤 일부는 내부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다시 돌로 장식한 백제식으로 만들어졌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건국에 참여한 세력이 다양했던 만큼, 초기 백제의 왕계도 이원화되어 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크게 온조 계통인 초고계와 비류 계통인 고이계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왕통이 번갈아 가며 이어지던 중 초고계인 근초고왕 때 이르러 왕실 계통이 단일화되는 양상이 나타나는 거지요.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다른 계통이 넘보기 힘들어질 만큼,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흔적은 삼국사기 기사에도 드러납니다.


근초고왕은 즉위 직후 정월에 천지에 대한 제사를 직접 지냅니다. 원래 전근대 동양 사회에서 하늘과 땅에 대한 숭배와 제사는 ‘황제’만이 가능한 행위인데 말이죠.


3472594408828178512.jfif 석촌동에서 발견된 굽다리 접시로 제의에서 사용된 물품이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에서 촬영.


힘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썼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강대해진 왕권으로 왕은 그간 한반도의 지배자들이 감히 생각지 못한 웅지를 펴나가기 시작합니다.




미래지구를 다룬 글에서 서술했듯, 364년 근초고왕은 왜의 사신들에게 왕실의 보물창고를 열어 진귀한 물건을 보여주고 선물합니다. 이는 외부와 당시 변변한 외교 창구나 교역 루트가 없던 왜의 교역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367년 백제와 왜,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수립합니다. 근초고왕은 대륙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백제의 국제 교역망에 왜도 참여하게 유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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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칠기(좌)와 이를 복원한 복원품.(우) 시대를 앞서간 세련미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에서 촬영.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제가 왜에 대한 독점적 교역권을 얻고, 향후 한반도 남부 공략에 앞서 이 지역의 교역권을 넘보던 신라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열도를 잇는 백제 중심의 교역망을 확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와 외교관계를 맺은 2년 만인 369년, 근초고왕은 더욱 공격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 등은 군대를 이끌고 탁순국(경남 창원)에 이릅니다. 바닷길에 이어 경남 내륙에서도 왜와의 교역로를 독점하고, 이 지역 가야 소국에 대한 종주권을 형성하기 위해서였죠.


3472594408824307536.jfif 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철제 껴묻거리와 장신구. 철은 왜가 가장 선망하던 물품이었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비자벌(경남 창녕) 일대 가야 7개국과 부자(父子) 관계를 맺는 등 가야 소국의 복종을 받아낸 백제군의 말머리는 남해에서 서해안으로 향합니다. 전남 강진에 이르러 마한의 침미다례를 무력으로 정벌한 것이죠.


이어 근초고왕의 본대가 태자 근구수와 함께 합류하자 전북 일대 4개 읍은 스스로 항복합니다. 백제가 마침내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3472594459331363408.jfif 충남 천안시 두정동에 있는 백제 움무덤(좌)과 독무덤(우). 백제가 남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등장한 무덤이다.


남방을 평정한 백제군의 이런 전과는 국내 사서가 아닌 대개가 일본서기에 전합니다. 일본 사서에는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이라는 형태로 왜곡 및 윤색되어 있지요.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마한 정벌의 주체를 백제에서 일본 야마토 왕권으로 교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정의 주체인 목라근자나 백제왕 등의 흔적은 차마 다 지우지 못해 어정쩡하게 정벌의 보조인 양 적어놓았습니다.


지금에서야 한일 양국에서 누적된 고고학적 연구와 함께 국내 문헌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이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경향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다만 석촌동에 대한 관심이 조금만 더 일찍 있었다면 더욱 많은 유물이 살아남았을 것이고, 어쩌면 간접적으로 이 시기에 대해 더욱 많은 사실을 알려줬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3472594408890895696.jfif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뼈 갑옷. 실전이 아닌 의장용으로 고위 지휘관이 착용했을 것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이와는 달리 근초고왕의 북방 전쟁 기록은 주로 국내 사서에 충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당시 한반도 국가들과 고대 일본의 관심 지역이 달랐을 테니 당연한 결과겠죠.


호로고루 편에서 다루었듯이 이 시기 백제군은 고구려와의 대결에서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면서, 두 나라는 중국과의 교역로이자 문화 및 인적 인프라가 풍부했던 황해도 옛 대방 땅을 두고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이었죠.


369년 가을 태자 구수의 활약으로 고구려와의 서전에서 완승을 거둔 백제군은 그해 11월 한강 남쪽에서 군대를 대대적으로 사열합니다. 이때 사용한 백제군은 황색의 깃발을 사용했는데 황색 역시 황제만이 사용 가능한 색상이죠. 기세가 절정에 오른 백제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일화입니다.


3472594452903638864.jfif 전북과 충남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시기의 '고리 자루 큰 칼'. 백제 지휘관들의 주요 무기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연이은 전투로 황해도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백제는 371년 겨울 평양성 공격에 나섭니다. 여기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지요. 왕의 죽음이 백제군의 의도된 계획인지 전투 중의 우연한 사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향후 광개토대왕비에서 보듯 고구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를 ‘백잔(百殘)’, 즉 백제 잔당 또는 찌꺼기라는 멸칭으로까지 부르게 됩니다. 백제로서도 결국 고구려와 피로 피를 씻어내는 혈전을 거듭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고요.




패권은 쌓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다행히 근초고왕은 대업을 이루는 방법도 이를 수성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지식의 공유가 곧 영향력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깨달은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초고왕은 왜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했는데, 이런 문화 전수는 일본 야마토 왕권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줍니다. 물론 이는 향후 백제에도 다시 큰 도움으로 되돌아옵니다. 백제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성장한 왜와의 물적·군사적 협력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기반이 되어줬으니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배워서 남 주냐’는 말이 진리처럼 통할 때가 있었습니다. 산업의 고도성장기, 획일적이고 압축적 학습 시스템이 필요했을 때나 통용될 말입니다. 산업의 전환기가 오면 어느 때보다 기존 전문 지식끼리의 공유가 중요해지죠.


4세기 역시 한반도와 일본 역시 기존과는 다른 국가 시스템, 즉 ‘고대 율령제 국가’가 출현하거나 출현을 앞둔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백제는 이런 선진 소프트웨어를 왜라는 사회에 이식합니다. 이로써 왜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이들의 교역망을 활용하거나 군사 지원을 통해 다시 백제 전체의 역량을 강화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다양한 외부 세력과 교류하며 백제 중심의 국제적 네트워킹을 공인받은 것 역시 백제가 패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백제가 중국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갖게 되는 것도 근초고왕 때의 일입니다. 중국의 동진(東晉) 왕조는 372년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책봉하는데 이는 국제적으로 백제의 패권을 인정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3472594408807799632.jfif 칠지도의 복제품(좌)과 그 복원 모습(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같은 해 백제는 왜에 기이한 모양의 철검을 보냅니다. 아직도 일본 한 신사에 그 실물이 남아 있는 칠지도가 그것입니다. 명문의 해석에 이견이 있지만, 이 철검은 백제 멸망의 날까지 이어지던 백제와 왜와의 각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유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분공원에는 근초고왕의 마지막 흔적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석촌동 고분공원에 있는 무덤 중 가장 큰 3호분이 백제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합니다. 1970년대 조사에서 4세기 중국 동진 청자 일부와 백제 토기, 금제 장식품 일부가 나왔는데 무덤 규모나 연대로 볼 때 근초고왕의 무덤이나 아들 근구수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어느덧 3호분 뒤편으로 마천루가 석양에 반짝입니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왕대까지 빛나는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석촌동 고분군에 드리운 노을처럼 백제의 첫 번째 전성기도 점차 저물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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