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 <속일본기>
토성 안, 벚꽃잎으로 수 놓인 길을 따라 풍납초등학교를 지나면 ‘경당지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한적한 공원이 나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강아지와 산책을 나오거나 담소를 나누는 정경이 정겹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마을 공원은 아닙니다. 지금 보면 실감이 나지 않지만, 풍납동 토성의 핵심 유구 중 한 곳입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지구 자체가 통째로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미니, 그냥저냥 한 유적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이곳도 원래는 경당연립 재건축을 통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지난 1999년과 2008년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그간 좀체 보기 힘들었던 예사롭지 않은 유물과 유적이 대거 나왔습니다.
특이한 모양의 대형 건물터(44호)가 대표적입니다. 지금은 덩그러니 직사각형의 건물터를 판석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은 잡초와 봄 꽃이 유적을 지키고 있네요.
원래 건물은 앞쪽 작은 전(前) 실과 그보다 더 큰 건물인 후(後) 실을 나무다리로 연결한 여자(呂) 형태의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은 동서 너비 20여 m, 남북으로 약 15m인 후실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후실의 경우, 건물 내부와 외부를 엄격히 구별하기 위한 도랑도 파여 있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판석은 바로 이 도랑의 바닥을 알기 쉽게 표시해 둔 것이죠.
여느 건물과는 다르게 ‘단절’에 방점이 찍힌 건축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도랑에는 얇은 판석은 물론 그 위로 숯까지 정성스레 깔려 있었고, 건물은 원형과 반원형 3개의 기둥이 하나의 짝으로 천장을 받치고 있는 등 여러모로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내부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도 묘한 점이었죠.
이 44호 건물의 정체는 경당지구 내 또 다른 유적을 통해 풀렸습니다. 1999년 조사에서는 확인되지 않다가 2008년 발굴에서 백제 왕실의 우물이 하나 발견되면 서입니다.
연구원들은 처음에는 우물터를 목탑터로 추정했지만, 이내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3m 깊이의 비좁은 우물 안에 무려 215개의 다양한 토기가 일부러 넣은 듯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것도 약 5개의 단으로 구분된 채 각 단마다 40여 개의 토기가 층층이 쌓인 묘한 모습이었습니다.
발견된 토기의 모습은 더욱 기이합니다. 200여 개 토기의 목과 입 부분이 예외 없이 모두 깨어진 채 우물에 수장되었던 것입니다.
토기를 파손하는 ‘훼기’는 고대 동북아시아에서는 제사 의식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령과 죽은 자에게 바치는 제물로, 더는 이승에서 활용할 수 없도록 상징적으로 목 부분을 부러뜨린 흔적이거든요.
‘우물’ 역시 고대 한반도에서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키워드죠. 특히 박혁거세 설화 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우물과 왕권의 고결함을 연관 짓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아울러 우물 바로 옆 대형 구덩이(101호 유구)에서는 ‘대부(大夫)’명 항아리 등 많은 양의 토기류와 복숭아씨 등이 발견됐습니다. 소와 말의 머리뼈도 10 개체 이상이 발견됐는데 제사에 사용한 토기와 희생된 동물을 묻은 일종의 폐기장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44호 유구의 정체는 백제 왕실의 ‘신전’이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등장하는 백제의 ‘동명묘(동명왕 사당)’였을지도 모릅니다. 삼국사기에는 초대 온조왕부터 18대 전지왕 대까지 한성시대 내내 동명묘에 대한 제사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다 수도를 충남 공주로 옮기면서 더는 동명묘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동명은 고구려의 동명성왕이 아닌 이천 년 전 북만주에 있었던 왕국, 부여의 건국 시조입니다. 부여는 지금은 한국사에서 그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모두 자신들이 서로 부여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우며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이어갔습니다. 근현대 국가들이 정부의 '법통(legal legitimacy)'을 두고 논쟁하는 것과 어떻게 보면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우물에서 ‘참수’된 토기들에는 또 다른 특징도 있습니다. 토기의 생산지가 경기나 백제 중앙의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는 잘 쓰지 않던 지방 생산품이 많았지요. 특히 백제가 막 영향권을 확대하던 충청과 전라, 특히 전남 영산강 유역 일대 토기들이 다수입니다.
삼국사기 온조왕 기사에는 초현실적인 내용의 기사가 하나 나옵니다. 온조왕 25년에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치고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나는 변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본 일관이 말하기를 “이는 대왕이 우뚝 일어날 조짐이고,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라고 해석하죠.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병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경당지구의 우물과 깨진 마한의 토기들을 해당 기사와 결부시켜 볼 수 있지도 않을까요.
경당지구의 추정 연대는 약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입니다. 공교롭게도 백제가 마한 등 남방에 대한 경략에 나선 시점입니다.
즉 백제인들은 신속(臣屬)의 의사를 밝힌 마한인들로 하여금, 백제의 최고 신이자, 고구려와 백제를 포함한 부여족 전체의 ‘족조’인 동명에게 제물을 바치게 하면서 충성을 다짐받은 것이죠.
막 정복한 지역민들부터 받은 공물을 제단에서 의도적으로 파손하고, 백제 왕실의 신성한 우물에 넣는 제례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와 친연성은 있지만, 부여와는 큰 직접적 관련성은 없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부여는 백제인의 실제 조상은 아니고, 관념상에서만 존재했던 시조였을 가능성이 큰 셈입니다.
그러나 부여와의 연관이 전연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요. 초기 백제 역사에서 보이는 부여 출신 성씨들의 아슴아슴한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인 자신들이 부여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낸 점이 그러합니다.
고조선 멸망 이래 북방에서 수많은 부족과 집단이 한반도로 내려왔듯이, 백제 건국의 과정에 일부 부여인들이 동행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입니다.
2016년 충북 청주의 마한 고분에서 출토된 칼 하나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칼 손잡이가 오돌토돌한 동병철검(銅柄鐵劍)이었죠.
문제는 이 동병철검이 만주땅 부여에서만 출토되던 특징적인 유물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주를 제외하면 중국이나 한반도 북부에서도 나오지 않던 부여족의 유물이 난데없이 청주에서 발견된 셈이죠. 특히 손잡이의 돌기 부분이 상당히 닳아있어 칼날을 바꿔가면서도 그 손잡이만은 대를 이어 사용해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 교역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소수의 부여 출신이 남긴 가보의 흔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희미한 역사적 기억들이 백제인의 정체성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현대인들은 늘 ‘정체성 찾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때로는 과잉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미아가 되는 것을 그만큼 두려워합니다.
북방계 이주민과 한반도 중부의 선주민, 그리고 남방의 문화가 서서히 정체성을 빚어낸 것이 백제의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초기 백제사는, 새로운 환경에 서면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돌아보게 되는 우리와도 많이 닮았습니다.
백제인들 역시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제례 또한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의례적 과정이었겠지요. 우리들이 그러하듯, 백제 왕실이 신성한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되물었던 흔적이 바로 이 경당지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