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사의 다음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는 임진강을 떠나 서울 한복판으로 떠나야 합니다. 임진강 변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한 백제인들이 심사숙고 끝에 택한 다음 터전은 한강의 남쪽 자락,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입니다.
송파구 풍납동과 방이동에는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빌라들 사이로 거대한 왕국의 흔적이 아직도 깊게 잠들어 있습니다.
서울 곳곳 흩어진 고도(故都)의 파편을 모아가다 보면, 어느새 서울의 진정한 ‘원류’이자 풍요와 땅 ‘한성 백제’가 멋들어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선 서울 도심 밑에서 이천 년 전 도시로 떠나는 여정에 오릅니다. 우선 서울 지하철 5호선과 8호선이 교차하는 천호역으로 출발합니다. 천호는 현재도 서울 강동 제1의 번화가입니다. 유리로 번쩍이는 건물과 도시의 소음이 깔린 대로 사이로는, 위례성이 아직도 마치 송파의 터주인 양 자리 잡고 있죠.
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풍납근린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나옵니다. 절기상 춘분이 이미 지나, 연녹색 새순이 가지가지마다 점을 이루고 벚꽃과 매화도 환히 만개했습니다.
신록이 돋아난 나무들 뒤로는 2~3m 높이의 언덕이 길쭉이 뻗어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풍납토성의 성벽입니다. 정확히는 토성의 북성벽과 동성벽을 잇는 모서리 구간입니다. 토막 나고 유실된 전체 성벽에서 그나마 형태가 제법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호역의 부기 역명이 ‘풍납토성역’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풍납토성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고작 이 정도의 높이를 가진 언덕(?)이 정말 왕성의 성곽인지 의문을 표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성벽의 나이가 자그마치 1800살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토성의 높이는 최고 13.3m로, 아파트 5층 높이의 성벽이 3.8km 길이로 풍납동을 빙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죠.
조선시대에 축성된 서울 한양도성의 높이가 평균적으로 약 5~8m, 최고 높이는 약 12m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대에 한반도 북부와 중남부의 패권을 다퉜던 나라의 왕성으로는 모자람이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곳이 백제왕궁을 수비하던 격조 높았던 토성의 일부임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2층 상가 건물과 시장, 여기저기 주차된 차들이 성벽을 따라 여기저기 늘어져 있으니까요.
난개발과 산업화의 무작스러움에도 살아남은 동북쪽 성곽도 얼마 가지 않아 곧 끊어집니다. 성벽이 끊어진 구간부터는 꽤나 소란스럽네요. 바로 앞 풍납시장의 존재 때문입니다.
토막 난 벽의 단면을 따라 성 안쪽(성 안이라고 볼 수 있다면)으로 향하니, 상인들이 흥정하고 호객하는 소리가 더욱 커집니다. 1500여 년 전 성 내 백제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토성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은 또 다른 구간은 동성벽입니다. 끊어졌던 동쪽 성벽은 서울 풍납초등학교 인근에서 다시 그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곳에서 동성벽은 남성벽 구간까지 약 1km 정도를 따라 연결됩니다. 남성벽과 동성벽이 만나는 구간에는 남성벽 전망대와 동성벽 공원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토성 내 낡은 다가구와 연립 주택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떤 건물도 세워지지 않은 텅 빈 공간이 드문드문 나옵니다. 빌라 2~3채는 충분히 세울 공간이 공터로 남겨진 경우도 있습니다. 높이는 낮지만, 금속 울타리마저 있고요. 주민들이 놓아둔 화분과 봄볕 일광욕을 즐기는 고양이들이 공간의 삭막함을 그나마 덜어냅니다.
이런 곳들은 건물 철거 시 대지 밑에서 백제 유물이 나온 곳들입니다. 향후 복원 및 정비 전까지는 국가가 우선 이런 식으로 보호하는 상황이죠. 여느 서울 내 한적한 빌라촌과 다르지 않지만, 이곳이 엄연한 왕성이었음을 다시 상기하도록 만듭니다. 관계자 말에 따르면 토성 내에서 빌라를 철거한 후 땅을 파보면 거의 예외 없이 백제문화층이 나온다고 합니다.
풍납토성 일대는 1997년 이후 국가유산 보호를 위해 개발이 사실상 일체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는 있죠.
풍납토성은 1997년까지는 학계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때까지는 백제의 첫 도읍 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주로 추정했거든요. 몽촌토성이 초기 백제의 유물이 나온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남이나 천안(직산) 등 전근대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위례성으로 비정된 곳들이 번번이 유력 후보까지 오르지 못한 것도 백제 때 유물이 없거나 너무 빈약해서였습니다.
문제는 몽촌토성 그 자신과 옆 풍납토성의 존재였습니다. 몽촌토성은 물론 고대의 토성치고는 규모는 있었지만, 위례성으로 치기에는 크기가 아무래도 작았습니다. 아울러 아직 조사조차 잘 이뤄지지 않았던 풍납토성은 몽촌토성보다는 규모가 또 너무 컸죠.
그러던 1997년 신정 연휴, 풍납토성 내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학계를 뒤집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토성의 보존실태를 조사하던 이형구 선문대학교 교수가 우연히 해당 공사 현장을 찾았다가 인부들이 무언가를 파내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죠.
놀랍게도 지하 4~5m 토층에 수많은 백제 토기 파편과 불에 탄 목탄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인부들은 이를 마구 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국에 보고된 후 결국 조사가 이뤄졌고, 수십 년 간 몽촌토성에 발견된 것보다 더 많은 유물이 조사 과정에서 쏟아졌습니다.
그간 풍납토성 일대 보호와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잡음은 많았습니다. 다만 연구 성과가 매해 빠르게 축적되면서 토성 자체의 보존 필요성에 대한 사실상의 합의는 이뤄졌습니다. 서울시도 토성 내 토지 매입과 보상이라는 지난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보상 절차의 속도는 서울 부동산 시장의 등락과 반비례합니다. 시와 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2022년 서울 아파트 가격이 조정기를 맞으며 사업이 그나마 속도를 내나 했는데, 2025년 말 현재 다시 시장이 불안 조짐을 보이면서 향후 보상 절차의 난이도도 다시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네요.
재산권을 통제받은 주민들의 고통도 사실 상당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국가유산청도 불필요한 규제는 해소해야 한다는데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해와 욕망, 보존과 개발이 맞물리는 가운데도 25년간은 말 그대로 가가호호 주택을 하나씩 사들이며 토지보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500년간 조각나 있던 백제 왕성의 퍼즐은, 더디지만 중단 없이 그 전체 모습을 맞춰가고 있는 중이죠.
간혹 이렇게 보호할 가치가 있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죠. 다만 토성에게는 공정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말할 항변의 기회가 그간 충분치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풍납토성에게 직접 들어보는 수밖에 없겠죠.
지난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토성의 축조 연대와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풍납토성 동성벽의 중앙, 2011년에는 동성벽과 남성벽 일부 구간을 절개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단 기초 공사 구간 연대는 기원후 250년에서 320년, 향후 성을 증축해 완공한 시점은 310~370년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구간의 연대가 더 오래전으로 올라가긴 하지만, 초축 연대는 임진강 유역에서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남하한 시기와 얼추 들어맞게 되지요.
멀리 임진강 그러니까 칠중하에서 뱃길을 따라 남하한 곳에는 한강 하류가 만들어낸 비옥한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주기적으로 강이 범람하는 습지와 모래뻘 위에, 백제인들은 당시 동아시아사에서 유례가 없는 신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유사 이래 최초의 강남 개발이기도 하죠.
더욱 의미를 더하는 부분은 동원된 인력과 축성 방식입니다. 풍납토성의 축성은 연인원 138만 명이 투입된 대공사였습니다. 1380명의 장정이 1000일간 동원되어야 쌓을 수 있는 성이라는 뜻이죠. 공정 자체만 그렇고 성토와 목재의 채취나 운반 등 기타 작업에 필요한 인력은 연인원으로 200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백제인들은 바닥 기초를 생토층으로 다지고 높이 5m의 뼈대 성벽을 올린 후 이후에는 판축 공법을 통해 높이 13m, 너비는 40m인 거대 토성을 다져 올렸습니다. 이렇게 판축 공법으로 지어진 토성은 석성 수준의 내구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건축물에는 그 시대의 정신이 아로새겨집니다. 이런 공사는 단순한 기술과 인력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국가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이런 시스템에 익숙한 인적 인프라도 형성돼 있었다는 의미죠.
당대 중국 대륙 수준의 토목기술은 물론이고, 수많은 인력과 물자에 대한 ‘계량화’가 가능해진 사회가 들어섰다는 함의가 있는 것입니다. 백성을 효율적으로 징발하고 계산해 분배하던 수취체제는 이미 완숙의 단계였을 겁니다.
이른바 ‘편호제민(編戶齊民)’ 제도를 백제인들이 체화한 것이다. 즉 피지배층을 호적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율령으로 통제하는 체제가 정착했음을 시사합니다. 토성은 고이왕 시기 이후 나타나는 관직 체계나 율령 반포 등의 체제 정비 기록에 대한 간접적 증거이자 그 결과이기도 한 것이죠.
결론적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와 중국 대륙에 버금가는 선진적 통치체제가 한반도 중부에도 자리 잡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서구권에서 출판된 세계사 서적을 보면 아직도 기원후 3세기까지 한반도 북부는 물론 한반도 중남부를 한나라나 서진 등 당시 중화제국의 직할지처럼 표시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이 시기까지 한반도에 제대로 된 정치체가 없었다는 해외 학계의 시각이 단적으로 반영된 것이겠죠.
이 같은 관점이 분명한 편견과 오류임을 풍납토성이 이천 년의 풍파를 견디며 오늘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납토성은 1500년이 넘게 방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낮지만 단단한 성벽 곳곳에는 고대인들이 평범한 삶을 꿈꾸며 쌓아 올린,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집념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토성은 단순히 흙투성이의 유적이 아닌, 인류 보편의 미덕인 인내를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시대와 세상이 우리의 성취를 늘 알아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처럼, 설사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도 그 가치가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내면의 성취, 실패의 경험, 묵묵히 다져간 성장의 기록은 결국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정신의 성벽이 됩니다.
1997년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확인된 유물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 가치는 여전히 살아 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길고 느린 연구와 조사를 거쳐 비로소 다시 그 위대함을 되찾은 것입니다.
토성은 서울에서는 드물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취,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가치의 소중함과 마주 대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