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한성(1)] 임진강 돌무덤 밑에 잠든 나라

by whiteshore

한성 땅으로 들어서면서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겨울을 녹이는 봄비가 그치고 날이 말갛게 갠 날, 백제사 여행을 위해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열차에 몸을 맡깁니다. 목적지는 경기 연천과 파주입니다. 부여나 공주도 아닌 왜 임진강인가 반문하는 분이 계실 듯합니다.

하지만 임진강은 백제라는 국가가 잉태되기까지 치열했던 시행착오와 고민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입니다.


까마득히 먼 1800여 년 전, 압록강 유역에서 서해를 따라 한반도 중부에 다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을 마침내 찾아낸 곳이기도 합니다.




태곳적부터 변함없이 감청빛을 머금었을 임진강의 북변을, 봄바람을 맞으며 살짝의 인내를 갖고 걷습니다. 차도 잘 다니지 않은 비포장 길입니다.


3472594408859338064.jfif 봄날 임진강. 강 건너편이 연천군 학곡리다. 돌무지무덤과 청동기 때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어느덧 강변을 따라 길쭉하게 모여있는 돌무더기가 눈에 띕니다. 강바람에 일렁이는 버드나무들 옆으로 어른 머리통 크기의 강돌이 길쭉이 쌓여있습니다. 길이가 20m는 되어 보입니다.


돌무지무덤, 말 그대로 돌을 무더기로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무덤방 여러 개를 강변을 따라 만들고, 흙을 덮은 후 겉표면은 임진강의 강돌을 이용해 쌓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주로 임진강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입니다. 강물의 잦은 범람으로 본래 모습은 찾기 힘듭니다. 원래 형태는 긴 폭은 25m, 짧은 쪽은 10m의 꽤나 큰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곡.jfif 연천군 학곡리 적석총. 타원형의 돌무더기가 강변을 따라 쌓여 있다.


만약 안내판이나 표지판을 유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무덤이라고는 얼핏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외형입니다. 그러나 돌무더기 앞으로 다가서면 분명히 일반적인 돌탑과는 풍기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돌무지무덤은 무덤이라는 정체를 모르던 마을 주민들에게도 대대로 범상치 않은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무덤이 있는 행정동의 이름은 학곡리지만, 과거에는 마을 이름이 ‘돌마들’로 불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돌무지무덤에 유래한 지명이지요. 옛 이름의 흔적은 돌무지무덤 바로 옆 공원 이름에만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무덤이라는 인식은 없었음에도 주민들은 대대로 이 돌무더기를 ‘활짝각담’으로 부르며 신비롭게 여겨 왔다고 합니다. 마귀(마고) 할멈이 치마폭에 돌을 담아와 각담(돌무더기)을 쌓았다는 정겨운 민담도 전해집니다.


3472594408852569936.jfif 무덤은 임진강 변의 자연 강돌을 가져와 만들었다. 돌 틈 사이로 잡초만이 무성하다.


그러나 이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설입니다. 현재는 그 전설도 마을 주민들 상당수에게 잊혀졌습니다. 마을 인근에서 나이가 제법 지긋한 한 어르신에게 여쭈니,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에 들었으나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이야기만 들려줍니다.


‘신령’한 돌무더기는 지난 2002년에서야 그 신비스러움을 걷어내고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정체는 까마득한 서기 200년대에 만들어진 백제 초기의 무덤. 무덤 주인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180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 영향을 받은 듯한 외형의 무덤 내부에서는 멀리 북쪽 대동강변에 만들어진 낙랑토기와 청동제 방울, 대롱옥과 구슬로 된 목걸이 등이 대거 출토됐다고 합니다.


3472594408857163344.jfif 학곡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 덮개 돌에는 별자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여러 개 있다.


무덤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나 그간 조사를 통해 밝혀진 무덤의 축조 방식이나 장법을 고려하면, 간접적으로 고구려 계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적석총은 서기 100년대 후반에서~200년대 사이 기간에 임진강 일대에 말 그대로 느닷없이 집중적으로 축조됩니다. 현재 알려진 임진강 일대 적석총만 개성 일대의 것을 포함해 약 9기로, 한강 중류나 상류에서 발견되는 적석총보다 훨씬 이른 형태입니다. 부장품의 질이나 형태도 비교적 우수하고요. 현재 임진강 일대가 삼엄한 군사지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아직 확인되지 못한 고분들은 더 많을 테죠.


결국 이 돌무덤의 주인들은 머나먼 압록강 중부에서 내려온 고구려 계통의 사람들이거나 고구려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472594408850046288.jfif 임진강 일대에는 이렇게 특이한 외형의 돌무지무덤이 9기가량 존재한다.


푸르른 봄 하늘 아래, 이천 년 전 강돌로 만들어진 무덤이 남아있다니. 흡사 하늘길로 천손들이 강림했다는 신화의 시대로 돌아온 듯 한 풍광입니다.


신화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매우 복잡한 백제 건국 신화 중 가장 유명한 버전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이라는 전승입니다.


물론 신화는 신화죠. 그러나 백제인들이 구태여 자신들의 선조를 고구려인으로 꼽았다는 것에는 많은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백제 형성에 참여한 많은 세력 중 고구려 계통이 건국에 주도적이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다시 돌무덤으로 눈길을 돌려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계통 주민들은 대체 왜 압록강에서 이곳 임진강까지 남하해 뼈를 묻은 것일까요.


3472594408897827664.jfif 온조와 비류가 남하해 백제를 건국했다는 온조 설화를 묘사한 모형.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삼국사기는 온조와 비류 형제 등 비교적 소수 집단만이 한 번에 남하해 백제를 건국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고구려 계통의 주민들이 긴 시간 동안 여러 차례 한강 유역에 이주한 사실을 '신화'라는 틀로 압축한 것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임진강변에 적석분구묘가 축조되는 서기 100년대 중후반부터, 고구려에서는 혼란의 시기가 거듭됐습니다. 초기 고구려는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이 연합한 작은 사회였습니다. 압록강에서 성장한 ‘나(那)’라는 작은 정치체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5개의 부(部)로 통합됐고, 그 5개의 부는 각기 고구려 왕실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다툼을 지속했습니다.


건국 초기의 고구려를 주도했던 집단은 소노부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비류나부로도 표기하죠. 그러다가 차츰 주몽 계통으로 대표되는 계루부 세력이 소노부를 제치고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이 역시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로 비류국의 항복을 받는 신화적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소노부 세력 중 일부가 남쪽의 미개척지를 향해 과감하게 남하했다는 것이 백제의 기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실제 소노부 즉 ‘비류’나부 세력을 백제 건국 설화 속 ‘비류’나 비류 집단과 연결 짓는 학설도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 바 있거든요.


여기에 서기 100년 중반대 시작된 고구려 차대왕과 신대왕의 왕위 교체, 이어 산상왕 즉위로 이어지는 폭정과 혼란의 기록 역시, 이 시기 고구려 계통의 무덤이 임진강에 나타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정황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임진강의 적석총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시기에 한성백제의 중심 지역인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는 계단식 형태의 적석총이 갑작스레 하나둘씩 조성됩니다. 마치 여기 이 돌무지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임진강에서 한강으로 이동한 것처럼 말이죠.


3472594408779545680.jfif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무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임진강에서 돌무지무덤을 축조한 세력이 한강 하류 일대 토착세력과 연합해 세운 나라가 백제라고 주장합니다.


임진강 일대가 신화 속에서 온조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는 ‘하북 위례성’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수백 년간 외경심을 갖고 바라본, 이 외로운 돌무덤은 사실 백제사가 시작된 첫 무대를 증명하는 목격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운이 억세게 좋은 몇몇을 빼면, 인생사에서 곧게 뻗은 포장길을 걸을 일은 손에 꼽습니다.


배신과 투쟁을 피해 1800년 전 임진강으로 향했던 길도 필경 험난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곳 임진강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체념과 수용 대신, 손수 흙성을 쌓고 길을 내면서 말 그대로 '새로운 신화'를 거침없이 써내려 갔습니다.


백제는 그렇게 태곳적 임진강에서 남쪽 영산강까지 장장 600년간 많은 이들이 한발 한발 밟고 다져가며 만든 문명의 대로(大路)였던 셈이죠.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에게나 새로운 출발선에 서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차마 발을 떼는 것이 버거울 때도 많지요.


그런 때가 온다면 그 옛날 백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봄날 임진강의 모래밭을 차분히 디뎌보는 것은 어떨까요. 두려움을 조금씩 이겨내며 내디딘 자욱이 어느덧 자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단단한 대로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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