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한성(2)] 육계토성, 흙으로 다져 올린 신화

by whiteshore
(온조왕)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겠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임진강에 처음 정착했던 사람들이 초기 백제인들이라면, 그들은 터전을 임진강에서 왜 다시 한강으로 옮긴 것일까요. 다시 임진강을 따라 걸음을 재촉해 보면 해답의 실마리에 다가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3472594408848270928.jfif 1700년 전 육계토성으로 향하는 길.


학곡리 무덤은 강 북변에 조성돼 있지만, 우리가 가 볼 작은 토성은 임진강의 남단에 위치합니다. 학곡리 적석총을 출발해 약 3.5km를 걸으면 나오는 비룡대교를 건너, 강의 남쪽 강변을 따라 다시 2km를 이동합니다. 행정동도 어느새 연천군에서 파주시 적성면으로 바뀌어 있네요.


봄을 맞아 새로 갈아엎은 밭들 사이로 난 농로를 가로질러 주월리 마을을 지납니다. 향기로운 흙냄새를 맡으며 걷다 보니 작은 토성 하나가 외지인을 맞이합니다. 육계토성입니다.


3472594408847850832.jfif 파주 주월리 마을의 나 홀로 나무.


그런데 외양은 그나마 독특했던 학곡리 돌무덤과는 달리, 이정표와 안내판을 봐도 도무지 요새나 성으로 생각하기 힘듭니다.


성벽은 허물어져 야트막한 언덕이 됐고 그 ‘언덕’에는 여기저기 수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성 내부도 경작지로 활용 중입니다. 몇몇 주민들에 물으니 일부는 무려 배추밭이라고 하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작물의 경지로 이용됐다고 합니다.


다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돌조각들도 간간이 눈에 보입니다. 일부 조각들은 학자들이 발굴조사를 마치고, 임시로 포장을 한 모습입니다. 덧없는 세월로 성 내부는 어느덧 성벽 높이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래도 평탄하게 다져진 성의 모습에서 천수백 년 전 임진강을 경계하던 토성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강 변의 허물어진 토성에 최근 학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흔히 신화로 치부되는 백제 초기 기록을 역사로 연결할 물증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죠.


발단은 1996년 여름, 중부 지방을 휩쓴 기록적 폭우였습니다. 수마가 토성을 할퀸 1개월 후, 육계토성으로 답사를 떠난 한 향토사학자는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성 내부에 백제 토기 파편과 철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계가 당장 긴급 발굴조사에 들어갔고, 전형적인 백제 초기 수혈식 주거지가 다수 확인됐습니다. 최근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백제 초기에 축조된 성이라는데 의견이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3472594408846943056.jfif 육계토성을 알리는 이정표. 기타 다른 안내판은 없는 적막한 공간이다.


육계토성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성의 규모, 위치 그리고 축조 방식 때문입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약 1.8km로 삼국시대 초기 성곽 중에서도 대규모입니다.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풍납토성의 둘레가 3.7km라는 점을 감안하면 변방 지역의 토성치고는 범상찮은 규모죠.


특히 육계토성의 입지와 인근 유적의 배치 등이 한성백제의 도읍인 서울 풍납토성 일대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 학자들의 구미를 당겼습니다. 풍납토성은 한강, 육계토성은 임진강 하류에 위치합니다. 성 일대에 당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식 적석총도 산재하고 있고요. 거점 남쪽에 유사시 방어에 유리한 배후성이 있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3472594408846244176.jfif 육계토성의 성벽. 세월로 인해 완만해진 성벽의 경사를 따라 수풀이 우거졌다.


축조 시기와 축조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납토성은 판축(版築) 방식으로 쌓아 올린 토성입니다. ‘판축’은 사각형의 목재 틀에 흙과 부재료를 부은 후 방망이나 공이 등으로 이를 압축 후 다시 조립하듯 성벽을 쌓아가는 기법을 말합니다. 고대 토목기술에서도 상당한 노동력과 기술력을 요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지난 2022년 국가유산청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육계토성 일부 구간이 판축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처음 밝혀졌습니다. 판축 방식이 활용됐다는 점에서, 적어도 성을 쌓으려 한 사람들이 이곳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은 쉬이 유추할 수 있습니다.


3472594408844658768.jfif 고대의 하늘을 연상케 하는 육계토성 내부의 풍경.


공통점만 보자면, 육계토성은 서울 풍납토성의 초기 버전 내지 ‘프로토타입’으로 표현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90년대 초반 한 사학자가 처음으로 두 성의 유사성에 주목한 이래, 조사 결과가 차츰 누적되면서 최근에는 육계토성이 백제를 건국한 이주집단의 첫 수도(하북 위례성)라는 과감한 가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진강 유역에서 돌무지무덤을 쌓은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 이곳 육계토성이었을까요?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육계토성의 축조 시기는 3세기 후반입니다. 임진강 유역에서 적석총들이 만들어진 시기보다는 다소 늦은 시점이죠. 서울에서는 풍납토성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기입니다. 다만 향후 조사에 따라 육계토성의 첫 축성 시점은 앞으로 당겨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계토성의 기원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다만 서울 송파 일대에서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신도시 건설’이 한참일 무렵, 육계토성 역시 대대적으로 개축 또는 축성이 이뤄졌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임진강 일대의 방어시설은 강화하고, 비슷한 시기에 멀리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의 왕성 건설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뤄졌다면 분명히 어떤 계기가 있겠지요.


육계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된 3세기 중반 이전으로 시계를 잠깐 돌려보겠습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현을 설치합니다. 이후 토착민의 저항과 중국 대륙의 혼란으로, 이 중 낙랑군과 대방군만 황해도 일대를 지배하는 형국이 약 300여 년간 지속되던 상황이었죠.


3472594408718102864.jfif 풍납토성 축조를 묘사한 모형. 풍납토성과 같이 육계토성도 판축공법을 통해 지어졌다. 구(舊) 몽촌역사관에서 촬영.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246년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의 경계를 습격해 일대 주민들을 끌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고이왕은 백제의 8대 왕입니다. 이 시기부터 백제는 마한 소국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사서는 기록합니다.


아울러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비슷한 시기를 두고 관련 기록이 나옵니다. 중국 위나라에서 진한 소국을 낙랑군에 속하게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잘못 전했다고 합니다. 이에 마한의 한 지도자(신지)가 분노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는 것이죠.


중국 대방군의 태수가 사망할 정도로 격렬한 전쟁에서 대방과 낙랑 연합군이 해당 마한 국가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분쟁은 끝났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학계에서는 대개 삼국지와 삼국사기에서 묘사된 두 기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즉 당시에는 아직 소국이었던 백제를 포함한 마한 세력이 중국 한 군현과 제대로 맞붙은 사건인 것이죠. 독자적으로 낙랑을 공격했다는 고이왕의 군사활동도 마한 세력과 한 군현의 충돌 중 일부의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의 결과로, 임진강 일대 마한 세력 일부는 한 군현의 세력에 들게 됩니다. 고이왕은 어땠을까요. 잡았던 낙랑 주민들을 다시 돌려주면서 낙랑군과 화친을 택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백제가 낙랑이나 대방군과 충돌을 빚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꾸준하게 등장합니다. 고이왕의 뒤를 이었다는 책계왕은 낙랑과의 전쟁 중 전사했고, 낙랑군을 침공해 일부 현을 점령한 백제 분서왕도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살해당하고 말죠.


한 군현 세력이 성장하던 마한 소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간섭의 빈도를 늘림에 따라, 임진강 일대에 근거지를 뒀던 초기 백제의 안보적 위기도 심화됐을 것입니다. 특히 책계왕이 낙랑 서쪽을 침공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낙랑과 대방을 통하지 않고 직접 중국과 교통 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는 일 역시 중요했습니다.


시행착오로 코너에 몰렸던 백제는 크게 세 가지 방안으로 위기에 대응합니다. 우선 근거지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한강으로 옮깁니다. 아울러 임진강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이어 한 군현과 맞서면서도 문화 및 인적 인프라는 과감히 수용합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서울 풍납토성을 축조하는 등 임진강 일대 세력이 현재의 한강 하류로 이주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의 일로 훨씬 소급해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죠.


3472594408878688848.jfif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의 기와들. 기하학 문양이 인상적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촬영.


기리영 전투 이후 한 군현과의 전쟁을 주도한 마한 세력은 상당히 약화됐습니다. 반면 이후 마한 내에서 백제의 입지와 영향력은 강화됩니다.


풍납토성, 즉 하남위례성으로의 대담한 천도를 단행한 백제는 이후 한 군현과도 홀로 맞설 정도로 성장합니다. 백제는 고이왕 시기부터 관제 등 체제 개편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바로 이런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임진강 일대를 다시 백제의 영향력으로 편입했기 때문입니다. 한 군현을 견제하고 선진문물을 흡수하며, 북편 임진강 너머로 다가올 고구려와의 대결을 수행했던 북방의 전진 기지가 바로 잊힌 육계토성이었던 것입니다.




아직은 낯가림이 심한 초봄의 햇살입니다. 그럼에도 여행의 설렘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합니다. 도심을 떠나 고대의 성곽으로 향할 때면, 어느새 동심과 같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물론 새로운 시작이 항상 설렘만으로 채워지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예전부터 배우는 게 느렸습니다. 삶의 새로운 길목에 설 때마다 시행착오가 늘 길동무처럼 따라왔죠.


인생이 만약 목적이 분명한 어떤 시험과 같은 것이라면, 시행착오를 줄여야 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실수로 잘못 내디뎠던 그 자욱이 지도에는 없는 나만의 길이 되기고 하고, 인생의 우회로가 되는 날도 생기더란 말입니다.


백제인들이 택한 임진강 유역도 천혜의 경계로,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위험한 공간이었습니다. 역사에 다 못 담긴 우여곡절이 많았겠지요.


그러나 임진강에서의 어설픈 고군분투가 없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대국 백제가 과연 있었을까요. 실패에서 배운 경험으로,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 안에서도 성장의 기회를 찾아간 것이 백제의 초기역사입니다.


적들로부터도 거리낌 없이 인적·문화적 인프라를 적극 흡수해 가며, 그렇게 ‘소년 국가’ 백제는 수십 개의 소국 중에서도 으뜸가는 국가로 다음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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