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생활, 적응기

by 혁꾸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서서히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정말 출발하고 있구나, 캄캄한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점점 멀어져 갔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그때 복도 침대 2층에서 한 러시아 꼬마 여자애가 보였다. 짐 정리를 할 때부터 외국인이 신기한지 우리를 계속 관찰 중인 한 꼬마 소녀였다. 내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쳐다보다가 시선이 느껴져 꼬마 아이를 쳐다보면 눈을 휙 피하며 안 본 척 연기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눈이 마주치는 타이밍에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표정이 웃겼는지 실실 미소를 짓는 아이였다. 그때 아래층에 있던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꼬마 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헉, 분명 나 때문에 혼나는 것이 확실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장난치지 말고 어서 자”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뇌 속에서 번역이 되어 들렸다. 진짜 정말 미안했는데, 외국인 아주머니께 혼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그냥 자는 척을 해버렸다. 정말 미안했는데, 피곤했는지 자는 척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고 나니, 귀여운 러시아 꼬마친구의 가족들은 새벽에 내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 여행 중 가장 놀랐던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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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혁구야 큰일 났어! 얼른 일어나 빨리! 빨리!”

2층에 있어야 할 인웅이 형이 급하게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인웅이 형의 다급한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진이가 안보였다.

“빨리! 빨리 이쪽으로 와봐!”

인웅이 형의 재촉에 슬리퍼도 한쪽만 겨우 찾아 신은 뒤, 성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형의 뒤를 쫓았다. 인웅이 형을 따라 열려 있는 열차의 입구에 도착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이미 밖에 나와있었다. 급하게 열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영하 20도의 새벽, 눈 쌓인 어느 역의 플랫폼에서 한쪽 발은 맨발인 채로 인웅이 형의 흡연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하하하하, 짓궂다 정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보니, 성진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다. 인웅이 형은 오자 마자 “잘 자, 혁구야”라며 한 마디 던진 뒤, 금방 잠에 들었다. 얄밉다. 나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는지, 1시간을 뒤척인 뒤에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새벽정류장.PNG 인웅이 형 때문에 뛰쳐나갔던 새벽 정류장


[ 반가운 한국인, 친구들 ]



열차의새벽.PNG 더러운 창문도 속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일출

‘투둔- 투둔… 투둔- 투둔-‘

지하철이 철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열차 안에서 첫 일출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잠에서 깨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낮은 언덕 너머로 빛이 점점 넘어오기 시작했다. 횡단 열차의 첫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햇빛이다. 모두 잠들어 있는 사이 배가 고파서 인웅이 형이 새해를 맞아 사 온 컵 떡국을 먹기로 했다. 뜨거운 물을 받으려면 보온 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처음 써보는 보온 통에는 두 개의 레버가 있었다. 사실 딱 보면 무조건 위에 있는 레버가 뜨거운 물 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당시에는 무엇에 홀린 듯이 밑에 있는 레버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는 물의 온도를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자리로 돌아와 3분을 기다렸다. 세상에, 3분 뒤에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면을 집었을 때가 되어서야, 물에 젖은 딱딱한 면을 발견했다.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은 그냥 나였다. 아, 내 아침이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은 정말 조용하다. 창 밖으로는 눈 쌓인 드넓은 평야와, 하얀 나무 숲들이 번갈아 지나가고,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 소리만이 작게 울린다. 친구들은 자리에 누워 터지지도 않는 휴대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열차 안을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 칸에 한국인들이 꽤 많았다. 바로 옆 좌석에는 세 명의 한국인 여성분들이 있었고, 맨 끝 좌석에는 혼자 여행 온 남성 한 분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자리를 쓰는 한국인 남성분은, 알고 보니 경찰이었다. 경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없었겠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분명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왜 이렇게 찔리는 기분인지.


차장실에서는 각종 기념품과 약간의 간식, 생활품을 구매할 수 있다. 간식을 조금 구매하면서 차장님과 친해져서, 내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발음 하기가 많이 힘드신가 보다. 내 이름은 혁구인데, 자꾸 퍽쿠 라고 발음을 하신다. 왠지 욕을 먹는 느낌이다.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맙다고 말씀드렸다.


열차 안에서 일출을 맞이한 게 1시간 전인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열차 안에 있는 한국인 친구들이 생겼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계속 눈을 마주치며, 서로 말을 붙일 타이밍을 잡던 같은 칸의 끝자리 친구, 그리고 같은 칸 한국 사람들끼리 잘 지내보자며 간식을 한 바구니 가져와 선물해준, 옆 좌석에 거주 중인 양산에서 온 친구들이다. 오늘 하루 종일 어색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준 덕분에, 지금은 편하게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떠들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전부 나이가 엄청 어린 친구들이었다. 확실히,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 여행에서 느껴지는 설렘은 훨씬 더 큰 것 같다.


열차보드게임.PNG

열차에서 다 같이 보드게임을 즐겼다. 진 사람은 20분 정도 정차할 예정인 다음 역에서 눈세례를 받기로 했다. 나는 시작과 동시에 확정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임을 못하지.

주위에 친구들이 조금씩 생기니까 열차 안의 생활이 조금씩 더 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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