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총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천천히 걸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역까지 걸어가면 여러 가지 여행 명소를 만날 수 있다. 사실 그냥 걷기만 해도 반대편으로 낮게 깔려 반짝이는 블라디보스토크가 훤히 보였다.
언덕을 내려가니 니콜라이 황태자 개선문이 보였다. 많은 여행객들에게 아름다운 여행 사진을 선물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2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개선문은 건물들 사이 전쟁 공원의 한쪽에 ‘사도 성 안드레아 소성당’과 함께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개선문과 마찬가지로, 옆에 조그맣게 함께 하고 있는 성당도 사람 한 두 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여서 아주 조화로운 모습이다. 이 개선문을 지날 때 속으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하니, 발 길이 끊어질 수가 없다. 미신을 믿든 안 믿든 내 염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소망이 개선문을 지나는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바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을 만날 수 있다. 영원의 불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 군인들 중 돌아오지 못한 5만여 명의 군인들을 추모하는 불꽃이다. 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불태워 희생했던 전사들의 영혼과 정신이 영원의 불꽃을 계속 불타오르게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하기 전, 마트에 들려서 열차에서 먹을 식료품을 구매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서 봉지라면, 전투식량 등 여러 가지 음식을 구비해와서 따로 마트를 다녀올 필요는 없었다. 역 안의 짐 보관실에서 가방을 되돌려 받았다. 가지고 있던 표를 보여주면 바로 가방을 꺼낼 수 있다. 우리가 타게 될 열차의 출발 시간은 오후 9시 30분이었다. 30분 정도가 남은 시간에 역 안의 벤치에 앉아 한국에 있는 가족과 여자 친구에게 안부를 전했다. 열차를 타게 되면 인터넷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마지막 인사라고 볼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이며, 모스크바까지 가는 러시아 기차여행의 낭만,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3주 만에 써 내려간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이다. 플랫폼으로 들어가기 위해 올라온 육교에서 횡단 열차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차디찬 겨울밤, 역 곳곳이 쌓여 있는 하얀 눈을 녹아내리게 하는 열차의 뜨거운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타는구나’.
열차의 모습은 마치 영화 ‘해리포터’ 속의 9와 4분의 3승강장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호그와트로 향할 준비를 하는 열차의 모습 같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선 열차의 칸 입구마다 나와 계시는 차장님에게 여권과 티켓 검사를 받아야 한다. 두꺼운 외투를 걸쳤지만, 추운 날씨에 매 호흡마다 입김을 내뿜으시며 오들오들 떨고 계셨다.
“스노븸 고돔”
러시아에서 써먹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연습해온 이 단어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뜻이다. 처음 써보는 인사말이었는데, 너무 자신감 없게 말한 탓일까? 돌아오는 인사가 없었다. 분명 이 발음이 맞는데…
엄청 꼼꼼한 표 검사가 끝난 뒤에, 우리는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발을 올릴 수 있었다. 우리의 첫 번째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좌석은 3등석 칸이었다. 3등석 칸은 긴 복도를 중간에 두고 양 옆으로 침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한쪽은 2층 침대가 두 개씩 복도를 수직으로, 한쪽은 2층 침대 하나가 복도와 평행으로 한 칸에 총 6명이서 서로를 마주 할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어둑한 취침 등 만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복도를 통해서 좌석을 이리저리 찾았다. 마치 영화가 시작한 후 어두워진 영화관 안으로, 뒤늦게 들어와 자리를 찾는 느낌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라서 그런지, 주위 사람들은 짐 정리로 분주했다. 밖의 추운 날씨와는 정 반대로 열차 안은 아주 따뜻하다. 우리의 자리는 복도와 수직으로 된 4개의 침대 자리였는데, 안 그래도 작은 공간에서 세 명이서 짐 정리를 하려고 하니, 숨만 쉬어도 땀이 흐를 것 같았다. 이미 짐 정리를 위해 캐리어와 좌석을 이리저리 옮긴 탓에 점점 체취가 진해지고 있었다. 성진이와 인웅이 형의 침대는 2층 나는 1층 좌석이었기 때문에, 두 명에게 먼저 짐 정리할 시간을 주고, 나는 자리에 쓰러져 누웠다. 정말, 아늑한 공간이다. 창문으로는 역의 플랫폼이 보였다. 차가운 바깥공기에 창문의 모서리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 4일간 하게 될 열차 생활, 괜히 낭만적인 여행이 기대된다.
친구들이 분주하게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열차를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어느 곳을 가던, 화장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외적 모습과는 다르게 더러운 화장실은 잘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기분이 좋고 걱정이 사라진다. 그래서 화장실의 청결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은 칸 마다 총 2개이며, 성별에 상관없이 남녀공용이다. 화장실은 뭐, 생각했던 것보다는 깨끗했다. 사실 애초에 기대를 안 하고 왔기 때문에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공간도 넓고 물도 꽤 잘 나오고, 거울도 깨끗하다. 악취가 조금 나서 불쾌했지만 나중에 보니 변기 뒤로 냄새를 제거할 수 있는 방향제도 잘 구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화장실의 변기에는 물이 많이 받아져 있지 않다. 레버를 내리면 밑을 바치고 있던 마개가 열리는 구조였다. 아마 열차 안에서 물이 소중하기 때문에 절약을 위한 것인 것 같다. 나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화장실에 대한 총평은 ‘이용 가능’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식수가 없어, 밖에서 생수를 사 와야 하지만, 뜨거운 물은 공급된다. 들어온 입구를 향해 돌아가다 보면, 빨간색 레버가 달린 보온 통이 보인다. 위 쪽에 달려 있는 수도꼭지가 뜨거운 물이며, 아주 뜨겁다. 그리고 아래에 달려 있는 똑같은 색의 레버를 돌리면 차가운 물이 나오는데, 마실 수 없는 물이다. 아마 보온 통에 물을 공급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이 보온 통을 사용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는데, 새해를 맞아 인웅이 형이 사 온 컵라면식 떡국에 마시지도 못하는 찬물을 잔뜩 담아와서, 소중한 식량 하나가 사라지는 비극이 일어났었다.
열차 안은 아주 따뜻한 온도를 유지한다. 반팔만 입어도 충분히 활동이 가능한 정도다. 열차 안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대충 짐 정리를 끝낸 친구들은 이미 2층에 자리를 잡고 누워 쉬고 있었다.
“어때 2층은 괜찮아?”
“2층? 너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봤어? 해리포터가 다락방에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 것 같아, 말포이 역은 누군지 알아? … 너야”
열차 좌석 예약 당시, 내가 두 명의 좌석을 2층으로 배정했었다.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확실히 성인 남성이 쓰기에 2층은 너무 비좁아 보였다. 천장이 코 앞에 있어 앉아있지도 못 하는 높이였다. 아무튼, 내 반대편 침대에 누가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빨리 짐 정리를 마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밖에 비해 열차 안은 어찌나 따뜻한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뻘뻘 흘렀다. 열차 안에서 샤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최대한 땀을 흘리지 않아야 했다. 출발까지 조금 남은 시간에 괜히 밖에 나가기도 좀 무서웠기 때문에, 입구와 반대쪽에 있는 통로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에도 이만한 냉동창고는 없을 것 같다. 어찌나 차가운지 뜨거웠던 몸이 식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내뱉는 숨마다 입 밖으로 두꺼운 입김이 쏟아졌다. 입김을 뿜어 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어릴 적에 드라이아이스로 만든 홈런볼을 입에 물고 입김을 뿜어내며 놀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