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 마린스키 연해주관에서,

by 혁꾸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나와 크리스마스를 맞아 열리는 연극을 관람하기로 했다. 2시에 마린스키 연해주 극장에서 열리는 ‘호두까기 인형’ 연극을 보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무조건 택시 어플을 통해 잡았다. 어디를 여행하든, 어플이 아닌 길거리의 택시를 잡거나 콜택시를 타게 되면 백이면 백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어플보다 가격차이가 심하게 나온다. 원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구글 검색으로 나오는 경로가 너무 복잡하기도 했고, 사람도 세명이라 택시를 이용하는 게 더 저렴했다. 택시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린스키 연해 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웅이 형은 연극 관람에 관심이 없어 아르바트 거리의 카페를 구경하러 가겠다고 했다. 나와 성진이는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허기를 채우러 식당이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근처 건물들 사이를 걸었다. 이럴 수가~ 거리에 이렇게 뭐가 많으면서도 없을 수가... 열려 있는 많고 많은 가게 중에 마트와 식당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파는 것 이라고는 입에 넣을 수 없는 철물, 전자기기 등이 즐비해있었다. 좀 더 걷다 보니, 다행히도 마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가게 안을 집중해서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영어의 머나먼 친척처럼 생긴 러시아어를 이해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그래도 별따기 보단 쉬우려나.

마트 안에서,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바닐라맛 콜라를 발견했다. “과연 이 조합이 맛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이런 새로움을 지나칠 수 있으랴. 바닐라맛 콜라와 함께 기다란 막대과자 뭉치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원시인 마냥, 흥분에 휩싸여 콜라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알게 된 그 맛은… 크흠,, 그저 새로움에 그치는 맛이다. ‘콜라에서 이런 맛이 날 수도 있구나.’ 그렇게 허기를 채운 우리는 연극 관람을 위해 마린스키 연해주 극장으로 걸었다.


극장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지품 검사는 필수다. 우리나라는 공항에서만 볼 수 있는 검색대를 러시아에서는 “이렇게나?” 싶을 정도로 자주 만날 수 있다. 소지품 검색대를 통과 한 뒤에는 매표소를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 인쇄해온 티켓 교환 종이를 매표소에 제출하니, 마린스키 극장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빳빳한 현물 표를 받을 수 있었다.

티켓을 받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난관에 봉착했다. 사전에 예약해 놓았던 좌석의 위치를 캡처 해 놓지 않았다. 티켓은 받았지만, 도무지 좌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숫자도 하나 없이 러시아어만 빼곡히 적혀있었다. 여행을 떠나 오기 전 간략한 러시아어를 꽤나 외워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티켓에 있는 글자를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에라이, 어떻게든 되겠거니 싶다. 표가 있는데 많은 러시아 사람들 중 우리에게 좌석을 알려 줄 사람이 한 명 즈음은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행사로 바쁜 극장의 1층을 이리저리 지나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에서는 정말 살면서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종류의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었다. 바로 극장을 찾아 준 손님들을 위해 겉옷을 보관해 주는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셀프로 캐비닛에 옷을 걸어 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벗은 옷을 테이블에 쓱 올려놓으면 직원이 와서 옷을 가져간 후 옷걸이에 걸고, 옷걸이 번호를 가져다준다. 이런 신기한 광경의 특급 서비스에는 적당한 대가가 따라오기 마련이지 않을까? 그래서 안 그래도 가벼운 지갑을 사수하기 위해 주변을 서성이며 현지인들의 반응을 살폈다. 특히 직원과 손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가지 않는지, 돈이나 돈을 지불했음을 증명하는 작은 종이조각이 오고 가지는 않는지 예의 주시했다. 약 5분의 관찰 시간이 지나고, 현지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자연스럽게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심히 겉 옷을 툭 던지듯이 올려놓는다는 점, 은밀한 눈빛을 교환할 새도 없이 옷을 낚아채 듯이 가져가는 바쁜 직원의 모습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서야, ‘이 서비스는 무료다.’라는 확신이 섰다. 자신감 있게 겉옷을 벗은 뒤 테이블 위에 옷을 올려놓으려다 순간 흠칫했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빳빳함이 식지 않은 연극표가 들어있었다. 하하, 자칫하면 없어진 표에 당황하여 러시아어로 가득한 극장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모습이 상상되어 아주 아찔했다. 주머니를 전부 확인한 후 테이블 위에 겉옷을 올려놓으니 직원 아주머니가 순식간에 옷을 낚아채어 빨려가듯 옷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받게 된 99번의 옷걸이 표였다.


옷을 맡기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 기둥 앞의 한 러시아인이 자신의 연극표와 기둥의 좌석 이정표를 번갈아 보며 좌석의 방향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다 싶어 다가가 연극표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즈비니쩨,, 그제,, 에따..?” (실례합니다,, 어디,, 이거?). 아주 짧은 단어 세 개로 이루어진 러시아어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에 치켜올린 손가락 세 개, 그 손가락은 그녀가 했던 모든 말들을 이해하기 충분했다. 삼층으로 올라가 커다란 여러 개의 문 중 하나로 들어가니 검표 직원이 서있었다. 검표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니, 따라오라는 손 짓과 함께 우리를 자리까지 안내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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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내부는 잔잔한 멜로디의 음악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커다란 내부는 아니었지만, 높은 천장과 벽에 붙어있는 난간 좌석들을 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공연 장면들이 연상됐다. 시간을 딱 맞춰 온 턱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은 시작됐다.


약 2시간 반 정도의 공연이 이어졌고, 중간중간 성진이를 확인해 보니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졸음을 이겨내고 있었다. 힘내, 성진아 이거 8만 원짜리 공연이야…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와 들었던 성진이의 첫마디는 “x나 재미없네.”다. 하긴, 웬만한 공연이면 재밌게 보는 나도 졸음을 참기 힘든 정도의 공연이었다. 인생 첫 극장에서의 연극이 실패로 돌아간 탓에, 미리 예매해두었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공연 계획이 흔들렸다. 한 사람당 총 20만 원 상당의 공연이었는데, 당장 예매를 취소하고 그 돈으로 맛있는 밥이나 더 먹자느니, 시간 아깝다느니, 성진이의 온갖 불신과 분노의 화살은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날까지 나에게 날아왔다. 하하,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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