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죄는, 남 탓도 못한다.

by 혁꾸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을 끝내고 역으로 가는 길, 교차로 건너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명소인 “혁명 전사 광장”이 보였다. 하지만 교차로를 건너가는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건너가는 길은 오로지 지하보도뿐이었다. 벽돌보다 무거운 캐리어를 어찌하리, 깊은 한 숨을 내신 뒤 공기가 빠진 폐 속으로 신선한 산소를 잔뜩 들인 채 호흡을 참았다.


광장에는 소련을 위해 싸웠던 군인들을 위한 거대한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역사에 무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영혼을 기리는 일이었다. 숭고한 마음과는 반대로 광장에는 러시아의 신년 축제가 한창이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의 온 가족들이 광장을 산책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발걸음을 멈추고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니고 싶었지만, 녹아 있는 눈 사이로 캐리어를 끌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20분 정도를 걸어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보이는 건물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찾아 1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예쁘게 꾸며진 분수대가 보였다. ‘여기가 역이라고??’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의 역내 모습이다. 여러 가지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분수대로 꽉 차 있는 실내 속에서 매표소를 찾았다.

“여기 아니네~”하고 지도를 막 확인한 인웅이 형이 말했다. 하긴, 어쩐지. 기차역이라기엔 너무 쇼핑몰 느낌이 가득하더라니.

쇼핑몰의 두꺼운 유리문을 밀고 나오니 건너편에 나의 쓰레기처럼 느껴지지만 소중한 캐리어를 드디어 보관할 수 있는 커다란 기차역이 보였다.



러시아의 기차역에는 짐 보관소가 있어서 여행이 좀 더 편하다.


역사에 도착해서 짐을 맡겼다. 짐을 맡기는 데 필요한 비용은 캐리어 하나당 180 루블이다. 약 3600원인데, 하루 종일 짐을 맡길 수 있는 것에 대한 비용으로는 아주 저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 나의 오늘 하루 일정은 아주 자유롭게 가볍게 상쾌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에서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실 러시아 철도청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예매하는 도중 실수로 국적을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즉 북한으로 해버렸다. (열차표에는 DPK로 나온다.) 정말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무식한 것이 아니라 Korea라는 단어에서 북한이라는 걸림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사실 Korea는 무조건 한국인 줄 알았다. 아무튼 이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서 블라디보스토크 매표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무거웠다. 사실 그냥 무작정 타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사실 이게 또 외국인들에게는 지금 나의 행동이 우리나라의 얼굴이고 예의일 텐데 쉽게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표소를 들러 핸드폰 번역기로 열심히 변역을 돌려가며 표를 재발행했다. 물론 무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발 무료로 되길 기대했던 나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크흡. 표 한 장 정보를 수정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은 375 루블이었다. 약 7천 원이다. 이렇게 비싸다고…?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사실 성진이의 표도 내가 국적을 북한으로 하여 예약했기 때문에 표를 바꾸는 비용은 두 배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예카테린부르크, 카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모든 구간을 이용하는 약 7개의 표가 모두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운명의 뒤틀림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 깨달았다. 부랴부랴 지식인에 질문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 매 초마다 아찔했던 기억이 난다. 인터넷에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멍청이가 세상에 나 혼자라니, 괜히 외롭고 비참했다.

한 사람에 7개의 표, 두 명 합쳐서 14개의 표를 다 교체하는 비용은 약 10만 원이었다. 하... 택시 20번, 식사 20번에 준 하는 피해였다. 매표소 직원과 마주하고 있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깊은 고민 끝에 울란우데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에서는 표 교환 값이 저렴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당장 필요한 티켓의 정보만 수정한 뒤 매표소를 나왔다.

사실, 생돈을 한 번에 많이 찢느냐, 한 장씩 찢느냐의 차이일 뿐이겠지만, 한 장씩... 나눠서 고통받고 싶었다.

26년을 살면서 자기 나라의 영어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니, 무지한 게 죄가 되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서 속으로만 되뇌었다.

'이런 멍청이... x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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