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참고 열심히 해봐,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거야."
내가 답답한 직장 생활을 할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답답하기보다는 더러운 꼴에 가까웠다. 내 인생에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니, 열심히 하라는 말은 보통 더러운 꼴을 겪고 있을 때 들려온다. 개인의 업무환경을 터무니없을 만큼 고려해주지 않는 사장을 상사로 두고 일하며 더러운 꼴을 보고 있을 때 특히 잦게 들린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은, 결코 배울 점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을 상대하는 그 순간, 분노로 가득 차서 부글거리는 내 감정의 분화구를 터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안전장치이다. 그래서 가까운 누군가가, 분노라는 감정의 화산을 터트리게 될 것 같을 때, 그로 발생하게 될 최악의 순간을 막기 위해 건네는 말이다. 일종의 진정제와 같은 역할이다.
마치 진정제와 같은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은, 사회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더러운 꼴을 참으며 일할 명분을 얻기에 참 좋은 말이다. 상사의 입에서 마른하늘의 폭풍우 같은 언변이 쏟아질 때, 일그러지려 하는 미간의 주름을 매끈하게 유지하고, 살가운 미소를 띤 을의 가면을 쓴다.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실실 웃기는. 에휴" 누가 웃는 가면을 쓰고 싶어서 쓰겠냐고. 한바탕 나의 인격이 침식되는 파도가 일고 난 뒤 다시 자리에 앉지만, 사실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거니와, 이런 수모를 겪으며 일할 바에는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 쯔음 이제, '하, 그래도 분명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니까'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 모공 사이로 피어오르던 스트레스도, 타오르던 퇴사의 욕구도 점점 사그라든다. 그래도 이 사무실의 한자리를 쟁취한 한 가정의 가장 혹은 누군가 일 텐데,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것이라는 마인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꼴을 피할 수 없기에 참고 일할 아주 좋은 명분이 되었지만, 딱 그뿐이다. 그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가끔 배울 점이라는 것이 있어 보일 때가 있는데. 학창 시절 등굣길에 솟아있던 은행나무 밑을 걸으며, 도로 위에 즐비하게 떨어져 있던 은행들을 어쩔 수 없이 지르밟게 되면,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은 평범한 도로들이 평소보다 더 깨끗해 보이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이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당연한 위치에서 해야 할 당연한 일들이다.
누구에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에 하나의 마법이 걸려있다면, 좋게 좋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마법이라는 게 실제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마법 영화 해리포터를 보더라도 마법의 지속시간은 꽤나 단기적이다. 휘두르고 있지 않으면 풀리는 지팡이 마법과, 일정 시간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폴리주스처럼, 누구에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의 마법은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풀려버리고 마는, 그 순간의 혼란스러움을 괜찮은 척 어물쩍 넘어가게 해주는 단발적인 마법이다. 화나는 일을 빨리 잊어버리고 넘어가기에는 최적이라 정신건강에는 이로울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경우도 종종 있다. "누구에게나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별로 달갑지 않은 자리에 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던가.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일용직 건설 노동, 일명 '막노동'이다. 새벽같이 일을 나가서 이른 땀을 뻘뻘 흘리며 오전 내내 일을 하다가 오아시스 같은 점심시간에 배를 두둑이 채운 뒤에 꿀 같은 잠을 자려했으나, 웬 일면식도 없는 아저씨한테 잡혀 그의 장황하며 안타까웠던 지난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내가 그런 원치 않는 상황들을 쉽게 뿌리치고 도망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쉽게 이 상황에서 도망갈 수 있는 이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저씨의 한이 담긴 과거 이야기를 한 시간 내리 듣다가 결국 마지막에 들었던 생각은 "아 xx, 잠이나 잘 걸"이었다. 원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억지로 파내어 듣고 있기에는, 나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이 너무나도 아깝다.
여러 분류의 친구들이 있다. 인생을 조금만 살다 보면 수 없이 듣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친구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믿고 걸러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상황을 봐가며 인생에 적용해야 하는 옵션이지만. 그 말들은 먼저 앞서가는 인생 선배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라, 보통은 그 말들을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런 친구들을 지칭하는 말들은 보통 폰팔이, 보험 팔이, 재무설계사 등등, 수 없이 많은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 직업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대중적인 인식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
두서도 없이 연락이 오는 친구가 있었다. 뜬금없게 말이다. 나 또한 적적했던 찰나, 가끔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면 재미있기도 했다. 약간의 허세가 있던 친구였는데, 나는 그 둘이서 만나 그런 허세 담긴 이야기들을 들으면, 허세인 줄을 알면서도 나름 재미를 느꼈다. 대중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은 일을 하는 친구였는데, 굳이 서로 재밌게 만나는 사이에 직업의 중요성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종종 연락이 올 때면, 쏠쏠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기대하면서도,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배울 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를 만나곤 했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두서없이 돈을 빌려달라는 금전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이거나,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 때문이었다. 그와의 재미에서 빠져나와 그의 성격에 대한 이성적이고, 명확한 판단이 서게 되었을 때, 결국 나에게 남는 건 추억조차 없었다. 아마 그와 나의 관계는 명확한 친구 관계조차도 아니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다, 회의감이 들어 뒤돌아 보았을 때는, 결국 배웠다 싶을 만큼 기억에 남는 배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호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할 때, 나는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을의 위치를 찾아가게 된다. 한마디로 호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배울 점을 찾게 된 누군가를 쳐다보는 내 눈빛은 반짝이고 있으며, 그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고, 우러러보게 되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의 또 다른 마법? 아니, 마법이 아닌 저주라고 볼 수 있다. 1부터 10까지 중에 그에게 배울 점은 2 정도인데, 6을 배워가고 싶어 하는 저주다. 상대방에 대한 동경이 클수록 그가 하는 말에 휘둘릴 확률도 크다. 그 이후로 그가 하는 말에 열심히 휘둘리다 보면, 어느새 저주가 풀리며, 상대방이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그에게 휘둘렸다는 생각이 들면, 나에게는 그에게 배울만했던 2 정도의 가치도 사라지고 없다. 콩깍지가 씐 탓에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그의 행동들도 정당하게 배울 점으로 치부한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서 배울 점을 찾는다면, 뭘 마시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벌컥벌컥 입안에 쏟아붓지 말고, 빨대를 꼽은 뒤 '아,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고 갈증이 해소될 만큼만 쪼옥 쪽 빨아먹는 것이 좋다. 빨대를 꼽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니 참 좋긴 하다.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까지 배울 필요는 없다. 인생에 있어서 감정을 컨트롤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정신건강이다.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일할 때 일하고, 놀 땐 놀고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더러운 꼴을 참으면서까지 누구에게나 배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깨끗한 도로에 은행을 뿌려대며, 피할 수 없는 지뢰를 밟는 꼴이 되게 만드는 사람에게서 하나를 배우려고 하기에는, 당신은 이미 자라오면서 가장 가깝고도 사랑하는 부모님께 배운 것들을 되새기는 게 더 유익하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을 추천한다. 온갖 사랑을 담아 나에게 유익한 말들을 해주실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꼭 부모님이 아니어도, 사회에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실수 없이 해나가는 사람들이 차고 널렸다. 내가 지금 있는 사무실 안도 마찬가지다. 배우기 위해 지독한 냄새가 나는 지뢰를 다시 밟는 것보다는, 수월하게 일처리를 하는 다른 동료의 조언을 듣는 것이 더 심리적으로 쾌적하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직장 상사의 조언 중, 주워 먹어야 할 것들을 알아서 골라 잡아 주워 먹는 것보다, 괜찮은 동료와 느긋한 시간을 가지며 하나부터 열까지 중 하나부터 여덟까지 차례대로 먹는 것이 더 편하다. 나머지 아홉과 열은 영업비밀이다. 공짜로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입에 넣어 주길 바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까지,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다며,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방에게서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더 많으니까. 똥을 찍어 먹어봐야 똥인 줄 아나? 아, 근데 똥을 찍어 먹어보면 누구보다 먼저 그게 똥인 줄은 알 수 있겠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라고, 나는 작은 실수로 욕을 먹으며 배우는 것과, 큰 실수로 위로를 받으며 배우는 것 중에 선택을 하면 된다. 다만, 선택권은 없다. 우리는 실수를 예상할 수 없으니까. 누군가에게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백 번 천 번 그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내가 한 번 경험하느니만 못하다. 물론, 처음부터 실수 없이 잘해나가면 좋으련만, 나는 살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뒤돌아보면, 여태까지 살면서 실수를 통해 배웠던 것들은 강렬하게 몸에 남으며, 몸에 남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감각을 통해 행동하는 것들이 많다. 굳이 예를 들자면, 과거에 거짓말을 들켰던 기억으로 인해, 애초에 걸릴 거짓말은 하지도 않는 다던가, 귀가 후 하루 종일 가스밸브가 열려있던 것을 알아채고 가슴을 쓸어내린 내가, 그 이후로는 외출 전 꼭 가스밸브를 확인한다던가 같은 그런 종류의 작거나 큰 실수들에 대한 대처가 몸에 남아있다. 비슷하게도 우리가 삶을 살면서 배우는 중요한 것들에 대한 대처는 우리의 몸에 각인된다. 누구에게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인생의 경험과 실수를 통해 자연스레, 어련하게 배우기 마련이다. 인간관계, 사회, 사랑 같은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그렇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할 때, 그 당장의 스트레스를 덮어 넘기겠지만, 나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첫 째는, 시간과 감정의 낭비. 그 당장의 스트레스를 덮어 넘기는 것으로만 사용되면 좋겠지만, 누군가를 대할 때 너무나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방의 모습이나 태도를, 멋쩍은 웃음으로 웃어넘기게 된다. 결국 뒤돌아보면 쓸데없는 이야기들과 도움되지 않는 조언들을 나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며 들어주게 된다. 결국 남는 건 재미도, 웃음도 없다. 게다가 경청하는 동안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쫙 펴진 주름과 살가운 미소를 가진 을의 가면을 쓰느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기도 했다. 분명 배울 점이 있었다. 그렇게 행동하진 말아야겠다는 점. 안 배워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그런 배움이다.
두 번째는, 호구가 되어버리는 나의 이미지. 하나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상대방의 별거 아닌 몇 가지의 모습도 대단하게 만드는 나머지, 나는 자연스럽게 관계에 있어서 을이 되어 버리고 만다. 갑과 을이 있는 관계는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면 참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모래사장에서 동전 찾기다. 그런 관계가 익숙해지면 하대를 받기 마련이고, 이용당하기도 용이하다. 그런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후에, 뒤 돌아보면 남는 건 호구 같았던 나의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 번째는, 무언가를 배워봤자 나에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은 겉으론 비슷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너무 뚜렷하기도 하다. 외향적, 내향적, 진취적, 보수적인 여러 가지 성격들의 여러 조합이 난무한다. 그렇기에 내가 흡수할 수 없는 것들은 배워봤자 쓸모가 없다. 만약 내가 정말 내향적인 사람인데, 외향적인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 하여, 하루 만에 외향적인 사람의 모습을 따라갈 수는 없다. 우리가 가끔 누구에게나 살갑게 다가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와, 너는 처음 보는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살갑게 대할 수 있어? 정말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도 물론 그렇게 다가가고 싶지만, 몸이 선뜻 움직이지 않고, 발표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지만, 막상 자리에 섰을 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리는
순간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개인만의 문을 열어주는 특별한 스위치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따라만 가려다간, 내가 가진 문제의 퍼즐을 맞춰 끼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겠지만, 아무에게나 배울 점을 찾는 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건,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배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배움의 모습이다. 배우고 싶지 않은 곳에서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배우려 하지 말고, 자연스레 굴러들어 오는 배움을 나에게 맞게 흡수하는 것. 진짜 배워야 할 순간에는 휘둘리지 않고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