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접시.

by 혁꾸

평소에 아끼던 아주 고운 흰색 접시가 있었다.

소중히 여기던 예쁜 접시였는데, 실수로 떨어트려 깨트리고 말았다.

접시를 되돌리기 위해 조각을 붙여가며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만,

더 이상 예전의 고왔던 접시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접시에 흉하게 뻗어있는 금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깨져버린 믿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


신뢰가 깨진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리라 본다. 신뢰라는 것을 하얀 접시에 비유해본다면, 우리는 튼튼한 접시를 믿고 그 위에 좋아하는 음식을 올려놓는 것과 같다. 예쁜 접시에 담긴 음식은 더 맛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접시가 금이 간 접시라면, 당신은 금이 간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을 수 있을까? 작은 접시 조각이 음식에 박히진 않을까, 금이 가서 취약한 부분이 다시 깨져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것이다. 결국 금이 간 접시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을 수가 없다. 물을 따라 놓아도 금의 작은 틈 새로 조금씩 조금씩 새어나가 결국 접시 위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겄다. 깨진 접시를 아무리 튼튼하게 붙이더라도, 1300도의 고온을 버티며 만들어진 새로운 접시보다 안전하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접시가 깨지면, 자연스레 다른 접시를 마련하기 마련이다.



보다 현실적인 인생, 믿음의 접시


신뢰를 접시에 비유했지만, 우리 삶에는 보다 현실적인 신뢰의 모양들이 많다. 깨끗한 접시는 첫 인간관계를 다지며 쌓아 올렸던 신뢰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가지 모양의 인간관계를 겪으면서, 신뢰의 기반이 되는 믿음의 모양도 변하며, 그것은 신뢰의 재료가 된다. 순수한 믿음이 재료라면, 당연히 결과물도 하얗고 깨끗한 접시일 테고, 누군가와 신뢰를 쌓는 시기에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얼룩졌다면 그 결과물에도 얼룩이 묻어날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겪으면서 하얀 마음에 서서히 얼룩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 조그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작은 거짓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돼서 되돌아보았을 땐 사소한 해프닝이지만, 그때 그 당시, 그 작은 관계들로부터 일어나는 문제들은 그들의 작은 세상을 꽉 채우기 충분하다. 우리는 꽤 이른 시기부터 믿음에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얼룩진 믿음이 연약한 신뢰를 쌓는 것은 아니다. 재료의 색만 다를 뿐이라, 결과적으로 신뢰라는 단단한 접시를 만들기에는 충분하니까.



얼룩덜룩한 믿음의 모양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게 된 탓에 사람들의 믿음은 갖가지 얼룩으로 물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하얗게 광이 반짝반짝 나는 접시도 예쁘지만, 얼룩덜룩한 접시도 그 만의 이점이 있다. 신뢰에 살짝 금이가 더라도,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하얀 접시에는 금이 조금만 생겨도, 금방 티가나 그 빛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얼룩진 접시에는 살짝 금이가 더라도, 어느 정도 묻고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건 신뢰가 깨졌다기보다는, '세상 물정을 알기에 어느 정도 수긍은 하겠으나, 심기는 불편하다'라는 얘기와 같다. 처음엔 사회관계를,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해서 아팠던 일들도, 인생의 몇 가지 해프닝을 겪고 나면, 경험을 통해 약간은 상대방의 환경과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주 같진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겪음으로써 얻게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아무리 얼룩진 접시여도 너무 금이 많이 생긴다면, 그 또한 그 가치를 잃게 되고 바스러져 버리게 된다. 얼룩진 믿음에 상처는 덜하겠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얼룩지기 시작할 때.


인간관계는 믿음이 쌓여 확신이 된다. 하지만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것 또한, 의심이 쌓여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과유불급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그 방법을 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무너지리라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믿음과 의심을 적당히 운용해야 한다. 믿음이 너무 깊으면 내가 받게 될 상처도 너무 깊을 태고, 의심이 너무 깊으면 인간관계는 그만큼 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음 없는 인간관계는 있을 수 없다. 기브엔 테이크가 기본이 되는 세상에서 믿음을 주지 않으면 믿음을 받을 수 도 없다. 누가 먼저 주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믿음의 거래는 동시다발적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해 거래되는 믿음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며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맞바꾸는 감정이다. 영악한 동물인 인간은 대화와 동시에 상대방을 파악하며, 행동과 손짓 어조를 통해 그의 말과 감정에 진심이 묻어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서로 믿음을 맞바꾸고 나면, 점차 점차 우리는 신뢰를 쌓아가며 이 사람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 거짓이 묻어난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믿음에도 점점 얼룩이 들기 시작한다. 그 묻어나는 거짓이 단발적이라면, 조금 금이 가는 것으로 말겠지만, 점점 잦아지며 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 의심도 점차 쌓이기 시작한다. 의심이 쌓이는 것은 두터운 신뢰를 가진 인간관계에서 더욱 무섭다. 안타깝게도 한번 의심을 시작하면,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평소와 같은 행동에서도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한 의미를 찾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두터운 관계는 웬만하면 깨지지 않지만, 금이 가기 시작하면 깨지기 전까지 금이 가는 횟수와 깊이가, 내가 받는 상처에 비례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서 의심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인간은 믿음과 의심을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치는 않지만, 믿음을 얼룩으로 물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죗값만 달게 받을 수는 없다.


인간관계에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거짓을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거짓은 작은 실수를 가리기에 아주 달콤한 방법이다. 순간의 거짓말로 실수를 덮었을 때, 우리는 작은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비난받을까 두려웠던 일들을 조용하게 해결해냈다는 쾌감, 무너질뻔한 인간관계를 순간의 응변으로 지켜냈다는 쾌감. 하지만 사실 그것은 능력도, 임기응변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인간성을 차츰차츰 갉아먹는 질병이다. 달콤한 쾌감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거짓말은 결국, 아주 기다란 꼬리가 되어 언젠간 밟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나면 정직했던 행동과 진실됐던 믿음들까지 모두 거짓이라는 너저분한 늪으로 치부되어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릴 것이다. 여기저기 구원의 손을 뻗어봐도, 주위에 잡아줄 이 하나 없는 외로운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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