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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꾸 Nov 17. 2021

비가 온 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날에 커다란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으면, 비가 내린다. 본래 알던 빗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빗소리는 사각사각거린다. 바람이 불어도 눈이 따갑지 않다. 땅 위에는 소복이 가을비가 메이 운다. 평소 고민되는 것들을 한가한 시간에 생각해보려고 쌓아놓지만, 정작 남는 시간에 그 고민들을 다음 쉬는 시간으로 미루며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노곤함을 즐긴다. 그렇다고 낙엽이 내리는 나무 그늘 아래서 그런 고민들을 생각하는 것도 웃기다. 그저 날씨가 좋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 별생각 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만 보고 있는 시간이 좋다. 일 년 중 얼마 안 되는 가을의 시간, 그 가을 속에서도 몇 안 되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이다. 짙은 낙엽 향과 바람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만나기 드문 가을의 어느 날.


 비가 내린 날 이후에는, 자전거를 타도 기분이 좋다. 떨어져 있는 낙엽을 가로지르면, 삭삭삭삭-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꽤 재밌다. 500미터도 되지 않는 낙엽이 쌓인 길이었지만, 나는 그 길이 내가 만족스러울 때까지만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어느 동산에 위치했던 외할머니 집 근처에는 아주 큰 낙엽이 내렸다. 아마 내 손이 작아서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테지만. 얼굴만 한 낙엽을 주워 바스 라뜨리는 걸 좋아했다. 사가각- 하며 작은 손으로 부서지는 낙엽 가루를 하늘 높이 뿌리면 마치 꽃가루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누워있는 것도 좋았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늘은 높고 낙엽을 머금은 부푼 땅은 푹신했다. 등 아래에 깔린 낙엽 사이사이로 바람이 통하는 듯 시원했다. 가을 향기에 취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는 채 낙엽놀이를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머니는 무슨 짓을 했냐고 하시며 뒤통수 사이사이에 낀 낙엽 부스러기를 골라주시고, 겉옷을 펄럭이며 낙엽을 털어내셨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받은 외투 등짝에서 나는 낙엽 향기를 좋아했다.


 가을에는 유독, 생각이 들지 않는 날들이 많다. 가을에는 유독, 드리우는 그리운 추억에 젖는 날들이 많다.


 이전에 생각 정리를 한답시고 홀로 여행을 떠났던 날이 있었다. 고독하려고 갔으나, 고독함이 불편하여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루 종일 입을 닫아서인지, 이따금 입이 근질해서 혼잣말을 할 때면 입에서 나는 단내가 스멀스멀 콧구멍에 닿았다. 역시 인생은 다른 사람과 섞여가며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맞았다. 역시 대부분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무튼 전역 후 인생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갔던 고독한 여행에서, 나는 어떤 생각도 정리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혼자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들었던 생각은 거의 없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었고, 관광지를 둘러보며 예쁘다고 생각했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미래에 대한 생각은 무슨. 여행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걸 좋아하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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