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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꾸 Sep 16. 2020

의미 없는 회사생활을 끊어버린 날

 늦은 저녁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고단했던 하루에 뜨겁게 내쉰 한숨은, 입김이 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늦은 퇴근시간 열심히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호흡은, 하늘로 솟아올라 밤하늘의 무거운 구름이 되었다. 

 하늘의 구름은, 열심히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내뿜은 뜨거운 호흡의 뭉텅이일까. 

하늘로 올라간 뜨거운 입김들은 아름답고 차가운 결정이 되어 땅으로 푸슬푸슬 떨어지고 있었다. 정류장에 서서 아무도 없는 거리에 내리는 고된 하루의 위로를 눈에 담았다.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른한 기분에 금방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아쉬움에 금방 잠들 수 없는 밤이다. 오늘 하루 회사를 다녀온 시간 말고 내 시간은 지금 뿐이었다. 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작은 바보상자 안의 SNS를 실행시켰다. 새로 고침을 누르니 최근 게시물에 대학 후배의 여행사진이 걸렸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촬영한 사진이었다. 열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후배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에 치이고 돈에 치이고 게으름에 치이고,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내가 어디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 액정에는 동물원에 갇혀 피폐해진, 목적 없이 그저 그냥 살아가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어디 갔을까.

 노트북을 켜고, 검색창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타는 방법’을 검색했다. 역시 세상에는 꼼꼼한 사람들 천국이다. 포스트 몇 개를 확인했을 뿐인데, 횡단 열차 예약, 루트, 여행지 등 여러 가지 정보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방법’만 검색했을 뿐인데 나는 이미 여행을 떠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관한 흥미로운 여러 가지 포스트를 잠깐 확인했을 뿐인데,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을 보내려면 이제 그만 자야겠다.

 눈 뜨고 일하는 내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하루 종일 멍하니 직장 상사가 나에게 쏟아내는 불만들을 이어져 있는 귓구멍을 통해 흘려내고, 손에 안 잡히는 일들을 억지로 쓸어 담아 처리했다. 그리곤 일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와 노트북을 켰다. 귀신에 홀린 듯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렇게 짜게 된 일정은 “23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이라는 제목이 되어 노트북 바탕화면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비행기표가 내 휴대폰으로 날아왔다. 여행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주뿐이었다.  직장에는 무조건 12월까지만 하고 관두겠다고 얘기했다. 사실 이렇게만 보면 갑작스럽게 3주 뒤에 퇴사하겠다는 책임감 없는 사람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두겠다고 말한 시점은 사실 9월이었다. 회사 사정을 봐주다 끌려온 3개월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학연, 사회관계, 의리, 끝맺음을 잘해야 한다’라는 ‘좋은 소리’로 예쁘게 포장된 수갑을 절단 내기 충분했다. 무슨 욕을 들어먹든 더 이상 정도, 미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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