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잠에서 깨어 조식을 먹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이미 거실에는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하다. 어제 자몽을 나눠 먹었던, 같은 동네의 친구들도 여행 준비에 한창이었다. 나도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시리얼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생각했다.
느긋하게 준비를 끝내고 짐을 모두 거실로 꺼내 놓았다. 체크아웃 시에, 다른 숙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게스트하우스에 무료로 짐을 맡겨 놓을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숙소를 나와서 러시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KFC의 특별한 메뉴를 먹어 보기 위해 KFC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햄버거 세트와 러시아에서만 먹어볼 수 있다는 특별한 KFC의 디저트를 주문했다. 특별한 디저트의 정체는 초콜릿 타르트였다. 이 타르트는 아주 진득하고, 깊은 초콜릿색을 가지고 있었다. 꾸덕한 초콜릿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지옥의 달달함이 느껴졌다. 와, 혓바닥이 마비되고 치아가 사르르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맛있는 척 연기했다. 이 지옥의 디저트를 나만 먹기는 아쉬웠으니까.
오전 11시 즈음 중앙시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 아닌데도, 시장의 상점들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헉, 시끌벅적한 이르쿠츠크의 시장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 순간 중앙시장을 즐기지 못하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말, 볼 게 없다. 아니 볼 수 있는 게 없다. 커다란 중앙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열려 있는 가게에서, 따뜻하게 보이는 방한용품만이 우리를 반겼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는,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처럼 아쉬운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아쉬운 상황을 붙잡고 있을수록 잃게 되는 시간은 많아진다. 문을 닫은 중앙시장 사이로는 찬 바람만이 휘날렸다. 중앙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미련 없이 깔끔하게 카잔 성당으로 향하는 트램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났던 양산 친구들과 일정이 겹쳐서 카잔 성당에 함께 가게 되었다. 트렘을 타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잔 성당 근처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이르쿠츠크의 초등학생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책가방을 등에 메고,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집으로 향하는 장난기 넘치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은, 우리나라나 러시아나 다를 게 없었다.
카잔 성당은 이르쿠츠크에서 들려야 할 여행지 중 한 곳이다. 버스 정류장 코너를 돌아 들어가니, 하얗게 눈이 쌓인 파란색 돔을 가진 커다란 카잔 성당이 보였다. 코너를 돌아 카잔 성당을 맞이 했을 때, 조용한 거리로 카잔 성당에서 성가가 흘러나왔다. 성당이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는데,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성당의 성가가 거리에 울렸다. 성당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성가에 마음도 몸도 점점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성당의 입구에 섰다. 카잔 성당은 생각 이상으로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다. 성당과 정원은 밤 새 내린 눈으로 새하얗게 덮여 있었고, 신부님이 길 위의 눈 들을 쓸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정원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정원에는 얼음으로 조각된 천사들과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얼음조각들과 눈 쌓인 소나무들 그리고 카잔 성당과 그 앞을 지키는 두 천사에게 둘러 쌓여 있으니, 성스러운 분위기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성당의 내부는 금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전부 황금빛 조형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늘은 세례의식이 있는 날인 것 같았다. 갓난아기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이 신부님께 세례를 받는 중이었다. 나도 군대에서 초코파이에 이끌려 세례를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경험과 달리 세례의식은 정말 성스럽고 고결한 의식이구나 싶었다.
다시 정원으로 나와서, 정원을 여행했다. 정원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나타내는 조형물들과, 성모자상, 마태복음의 천사, 요한복음의 독수리, 누가복음의 소, 마가복음의 사자의 동상들이 분수대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성당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 뒤, 성당을 나와 즈나멘스키 수도원으로 향했다.
현재까지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러시아의 신기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서진 자동차를 고치지 않고, 테이프로만 고정시킨 뒤 운전을 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테이프로 칭칭 감아 놓은 사이드미러, 테이프로 떨이지지 않게 붙여 놓은 자동차의 앞 범퍼, 깨진 라이트 등… 이런 것이 강한 사람들의 운전하는 방식인 건가?
즈나멘스키 수도원을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했다. 원래는 트램을 타려고 했지만 빙 돌아가는 경로 때문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관계로 택시를 타기 위해 큰 길가로 조금 이동했다. 양산 친구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우리만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가기로 했는데, 때 마침 도착한 트램에 양산 친구들이 급하게 올라탔다, 그런데 급한 상황에 휩쓸렸는지 인웅이 형과 성진이도 트램에 타버리고 말았다. 뒤에서 안된다고 소리치던 나도 어쩔 수 없이 트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택시 타야 된다고 분명 말했잖아… ”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우리는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즈나멘스키 수도원으로 이동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카잔 성당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원은 흰색 벽과 청록색 지붕의 조화로 엄청 심플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웅장한 모습과는 반대로 낮고 아담한, 우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수도원이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시베리아 최초의 여성 수도원이기도 하며, 수도원의 안에는 알래스카를 발견한 탐험가 셀리 호프와, 혁명가 데카브리스트 가족의 묘를 만나 볼 수 있다. 수도원의 내부도 반짝이던 카잔 성당과 달리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은은한 금빛 장식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성당 내부는 아주 조용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의 이르쿠츠크 마지막 관광지는 안 가라 강이었다. 우리는 안 가라 강 앞의 키로프 광장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가장 눈에 보였던 것은 얼음 미끄럼틀이었다. 정말 러시아 어디를 가도 도시의 광장에는 커다란 얼음 미끄럼틀이 있는 것 같다. 키로프 광장은, 철도 노동자 키로프 동지를 기념하는 장소로, 이르쿠츠크의 모든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안 가라 강으로 건너가는 광장 앞에는 10차선 횡단보도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호등은 없다. 분명 이것은 횡단보도가 맞는데. 다행히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거리인 듯했다. 횡단보도 건너편으로는 커다란 이르쿠츠크의 우체국 건물이 보였다. 우체국 앞 공원에서부터는 바닥에 관광객을 위한 여행 라인이 잡혀 있다. 초록색으로 된 실선을 따라가면 로마 가톨릭 교회, 구세주 교회 등 러시아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공원의 끝에서 드디어 안 가라 강을 만날 수 있었다. 안 가라 강은 얼지 않는 강이라고도 한다. 겨울철 안 가라 강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나니, 왜 얼지 않는 강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안 가라 강 위로 짙게 깔린 물안개는 마치, 강이 뜨거워서 뿜어내는 증기 같았다. 강의 모습을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 강의 물은 수심이 깊은 건지, 얕은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맑고 투명했다. 강은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강 속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물의 갈래는 서로 부딪히며 수백 개의 작은 소용돌이를 이뤘다. 작은 소용돌이는 서로 부딪히며 부서지는 물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일까, 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가 손과 뺨에 닿을 때면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치 강이 뺨과 손을 어루만지며 따뜻한 강으로 들어오라며 유혹하는 것 같았다. 섬뜩했다. 하지만 겨울철 자욱한 물안개와 함께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며 따뜻했다.
안 가라 강은 바이칼호와 연결되는 수백 개의 줄기 중 하나지만, 바이칼 호수를 나가는 줄기는 오직 안 가라 강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한 겨울에 얼어버린 채로 쉬지도 못하고, 뜨거운 증기를 내뿜으며 쉬지 않고 물을 흘려보내고 있구나 싶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얼어붙은 손 발을 조금씩 녹여냈다. 이제 이르쿠츠크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3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다시 타고 카잔으로 가는 여정이다. 양산 친구들과는 이제 정말 안녕이었다. 양산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캐리어를 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인사와 함께, 시베리아의 짧은 인연을 마쳤다.
여행을 할 때 누군가를 만나기란 참 어려운 것 같은데, 헤어짐은 왜 이렇게 쉽고 빠른 걸까. 겉으로는 웃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몇 걸음 가지 못해 다시 짧지만 지나갔던 추억들이 생각나 더 아쉬워진다. 낯선 환경 때문일까? 짧은 인연인 것 같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꽤나 깊은 정이 들어버렸다.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여행을 하며 이어지는 인연의 묘미인 것 같다.
언젠간 다시 만나 웃으며, 그때를 추억할 수 있는 날이 돌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