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석 칸
큰일 났다. 인웅이 형이 기차표를 현물로 교환해야 했는데, 이곳은 기차표를 바꾸는 매표소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열차 시간을 거의 맞춰 역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를 현물로 교환하러 부리나케 뛰어야 했다.
물어보니 기차표를 교환하는 곳은 승차장과는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멀리 매표소를 만들어 놓은 거냐고!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던 우리는, 맨 끝에 있는 매표소까지 달리면서 보이는 문이란 문은 죄다 열고 들어가, 매표소가 맞는지 확인했다. 결국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까지 실실 흘러나왔다.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여행객들과 마주쳤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이 매표소를 찾아 멀리서부터 찾아온 듯했다. 표를 교환하고, 다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플랫폼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열차가 출발해버리기 전에, 간신히 열차에 발을 붙일 수 있었다.
사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정말 아늑하지만 불편한 침대와, 찝찝한 배게 피, 몇 번째 재사용 중인 숟가락, 머리의 기름 냄새, 복도를 걷게 되면 마주치게 되는 2층 침대 사람들의 발로 이루어져 있다. 유후, 물론 열차의 아름다운 풍경과 낭만이 좋기도 했지만, 또 타라고 한다면... 뭐 한 번쯤은 더, 딱 한 번쯤은 더 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다르다. 이번에는 무려 2등석 칸이 우리를 3일간 편안하게 예카테린부르크로 모실 계획이었다. 우리는 이번에 2등석 칸의 2층 침대를 예약했었다. 열차에 올라 좌석으로 이동하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4명 이서만 사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 커다란 테이블, 넓은 침대, 넓은 수납공간. 아주 쾌적한 열차가 우리를 반겼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전처럼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 같다는 점이 제일 아쉽다. 그리고 2등석 칸 안에는 전기 콘셉트가 없었다. 사실 테이블 아래 전기 콘셉트가 있었지만, 우리는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3일간 복도에 있는 콘셉트를 사용했다. 누가 물건을 가져갈까 봐 벌벌 떨면서 말이다. 2등석 칸은 3등석 칸에 비해서 정말 너무너무 편안하다. 짐 정리도 손쉽게 침대에 누워서 할 수 있을 정도다. 열차에 탑승하고 한 숨 자고 일어나니 1층 침대칸에 두 명의 러시아인들이 탑승해 있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달콤하고 편안한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근데 진짜,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너무 편해서 다시 또 타러 올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1층 침대의 두 러시아인은 이미 내리고 없었다. 워후, 완전히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한 열차 생활을 보냈다. 배가 고프면 캐리어에 있는 봉지라면을 가지고 내려가 뽀글이를 끓여 먹었다. 지나가던 차장님이 신기한 듯 피식 웃으신다. 세월아 네월아 한량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인웅이 형이 우리 방에 찾아왔다. 인웅이 형은 예약을 늦게 한 탓에 같은 열차칸의 다른 방을 이용하고 있었다. 인웅이 형이 말했다. "야, 혁구야 일로 와봐. 유튜브 각이야" 쉬고 싶었지만, 따라오라고 강하게 자기표현을 하는 인웅이 형에 못 이겨 쫄래쫄래 형의 방으로 따라갔다. 어이구, 형을 따라 들어간 방에는 무슨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러시아 할아저씨 두 분과, 30대 초반에 빛나는 대머리를 소유하고 계신 형님이 계셨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온갖 과자들과, 고기들이 가득했다. 인웅이 형의 소개에 멋쩍게 웃으며, 간단한 러시아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불곰 할아저씨들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한국말로 "김치", "와사비", "목포"를 반복했다. 목포는 뭐지? ㅋㅋㅋ어이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김치!", "와사비!" 그리고 "목포!"라는 단어를 듣게 되다니.
방으로 데려가 성진이를 데려왔다. 프라이빗한 2등석 칸의 4인실 안에는 7명의 남자들이 부비적 대고 있었다. 불곰 할아저씨들은 커다란 생수통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종이컵에 물을 따라서 나에게 건네는데, 누가 봐도 술이었다. 할아저씨들은 물이 아니라 사케를 마시고 계셨다. "와사비"라는 단어에 사케까지 있는 걸 보니 일본 음식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원래는 횡단 열차 침실에서의 술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몰래 생수통에 술을 담아와 마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내 눈 앞에서 직접 일어나고 있다니. 오 마이 갓! 왠지 기분은 좋다.
우리는 서로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도 잘 캐치해냈다. 그렇게 하하호호 술을 마시며 떠들다 보니 취기가 점점 올라왔다. 너무 뜨거운 분위기에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 같아, 다시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술도 조금 올랐겠다,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도 따뜻하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나른함을 즐기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잠에서 일어나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성진이도 어느새 옆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복도로 나가 인웅이 형의 방으로 향했다. 오우, 웬걸 이 방의 열기는 아직도 뜨거웠다. 불곰 할아저씨들이 많이 지치긴 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새 나시를 입은 불곰 할아저씨들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왠지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