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이 되었다. 여전히 횡단 열차는 러시아의 추운 겨울을 뚫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배에서 점심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꼬르륵, " 딱히 특별하게 먹을 건 없다. 다시 캐리어에 컵라면 하나와, 감자 수프를 꺼내어 뜨거운 물을 받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게 울리는 철길 소리를 들으며 성진이와 밥을 먹었다. 이전과 다른 것은, 2등석 칸이라서 그런지 더 넓고 쾌적했으며 마음이 아주 편안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챙겨 온 시집을 읽고,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는 다시 인웅이 형의 방에 초대됐다.
인웅이 형의 방에는 새로운 친구가 있었다. 셰피엘이라는 친구는 25살, 우리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다. 그전부터 있었던 불곰 할아버지들은 '샤샤'라는 52세 불곰, '안드레아' 50세 불곰, '고스챠' 26세 불곰이다.
역시나 인웅이 형네 방은 한창 음식 파티 중이다. 도대체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오늘은 생수통에 보드카가 들어있다. 항상 종이컵에 보드카를 반의 반잔 정도 따라주는데, 한 번에 다 마시지 않으면 괜히 눈치를 준다.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다. 그리고 다 같이 건배를 할 때, 자기들은 종이컵 대신 주먹을 뻗으며 술은 마시지도 않는다. 한국 아저씨들보다 더 한 듯싶다. 설마, 저 보드카 전부 우리 주려고 산건 아니겠지.
어제부터 러시아 친구들이 가져온 러시아 음식을 먹으면서 놀았더니, 한국 음식도 맛보게 해주고 싶어 캐리어에서 안성탕면을 꺼내 조리해서 가져왔다. 돌아가면서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올린다. 고스챠는 라면 국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치를 보며 국물을 홀짝이다 이내 아얘 손에서 컵라면을 놓지 않는다. 나중에 탁자 위에 놓인 컵라면 속에 국물은 하나도 없이 면만 남아 있었다.
얼마 뒤, 더워서 살짝 열어 놓은 문으로 차장님이 들어오셨다. 깜짝 놀란 우리는,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입을 다문 채 굳어버렸다. 차장님은 불곰 아저씨들을 한껏 째려보더니 그들에게 말을 속사포로 쏘아댔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허허허' 하고 멋쩍게 웃으며, 차장님에게 귀여운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차장님의 손짓을 유추해 보았을 때, 우리에게 너무 술을 많이 먹이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장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셨다. 그 이후에도 아저씨들은 개의치 않아하며 우리에게 생수병에 들어 있는 보드카를 건넸다.
보드카에 취한 우리는,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방을 나왔다. 프라이빗한 방이지만 7명이서 부비적 대며 떠들고 있으니 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잠시 쉬기 위해 내 자리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하지만 나는 또 순식간에 잠에 들고 말았다. 어제와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야 혁구야 일어나 봐" 눈을 뜨니, 인웅이 형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떨어져 있었고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무렵이다. 인웅이 형에게 들어보니 같이 술을 마시던 불곰 친구들이 이번 정거장에서 내린다고 한다. 우리의 목적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노보시비르크'라는 역이다. 창문 밖으로 노보시비르크의 시내가 보였다. 아주 큰 상업지구 같았다. 예쁜 건물들과 4차선 도로, 그리고 러시아에 여행 와서 처음으로 높은 층이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우리는 열차 생활 내내 술과 음식을 나눠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캐리어에 있는 컵라면을 모조리 꺼냈다. 4개뿐이 되지 않지만, 우리에겐 모든 것이었다. 라면을 나눠 주니, 러시아 아저씨들도 고맙다며 봉지에 쌓인 얼어있는 생선을 건네줬다. ㅋㅋ이걸 우리가 어떻게 먹어요 여기서... 그래도 고맙다.
역에 도착해서 먼저 밖으로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노보시비르크라는 역에 도착하니 엄청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렸다. 열차 칸을 오가다가 가끔씩 마주쳤던 꼬마 형제들이 있었는데, 우리 주변을 기웃기웃하더니 갑자기 인사를 건넨다. 초등학생쯤 보이는데, 귀여운 녀석들이다. 그래도 외국인이 신기한지, 우리에게 다가와 한 명 한 명 악수를 건네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더니 이내 부모님과 함께 플랫폼을 떠났다.
그 뒤로, 불곰 친구들이 내려왔다. 열차 안에서는 나시만 입고 있었던 친구들이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가죽 재킷을 걸치고 귀를 올린 고급스러운 우샨카를 쓴 러시아 아저씨들이 보였다. 와, 진짜 멋있다. 열차 안에서도 나시만 입은 모습이 었지만 굵은 통뼈와 커다란 덩치여서 장난 아니구나 싶었는데, 밖에서 보니 더 멋있어 보였다. 기업의 고위 관직을 맡고 있는 중후한 샐러리맨들 같아 보인다. 플랫폼에서 흡연 시간을 가진 뒤에, 우리는 마지막 악수 인사를 나눴다. 진짜 불곰처럼 커다랗고 묵직한 손이었다. 곧이어 우리는 손을 흔들며 러시아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우리가 자러 갔을 때, 러시아 친구들이 번역기를 통해 자신들과의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우리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어서 인웅이 형이 우리와의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는지 번역기에 적어 건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건네받은 휴대폰 번역기에는, '너희를 만나서 행복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우연찮게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방을 쓰게 된 인웅이 형은, 이틀간 반 강제 반 자의로 술을 마시며 잠도 잘 못 잤지만, 정이 얼마나 깊숙이 들었는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노보시비르크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떠들던 중후한 러시아의 아저씨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이별했다. 그리고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하게 될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해 열차에 다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