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여행에, 우리는 지쳐갔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도심 속으로

by 혁꾸

도심으로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은 한결 상쾌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도심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실 예카테린부르크가 이렇게 큰 도시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카잔이라는 도시를 가기 위해 경유하는 도시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별 기대가 없었던 것도 컸다.


도심으로 걸어 가는데도 거리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그 건물들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여행에 지쳐있었다. 매일같이 도심에 즐비해있는 수도원, 교회, 성당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것들에 우리는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아센틱강


예카테린부르크의 중심에는 아센틱강이 흐르고 있다. 아샌틱강의 작은 댐 위로는 다리가 나있었다. 강에는 엄청나게 많은 오리 때가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오리들에게 먹이를 뿌려대고 있었다. 사실 꽤나 징그럽기도 했다. 먹이를 던지시는 아주머니를 보니 어린 시절 보던 영화 '나 홀로 집에'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 엄청난 비둘기 때에게 먹이를 주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아주머니랑 생김새도 똑같이 생기셨다. 혹시 그분일까?


아센틱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으로는 작은 터널이 하나 나있다. 바로 '빅토르 최'라는 사람을 기리는 터널이라고 한다. '빅토르 최'라는 사람은 한국계 러시아인으로 러시아 전설의 록스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의 원래 직업은 보일러공이었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지만, 부모님 세대는 모두가 알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게다가 한국계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초록색 빛이 감도는 '빅토르 최 터널'을 건너서 올라가면, 넓게 펼쳐진 아센틱강이 나온다. 생각보다 꽤 넓다. 그리고 얼어있는 아센틱강 위를 사람들이 건너 다니고 있다. 허허, 한 겨울이라서 가능한 건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을 따라 길이 나있었다. 이런 경험은 지나쳐갈 수 없는 법. 우리도 아센틱강 위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을 걷다 보면 강이 녹아 구멍이 뚫려있는 곳이 몇 군데 보인다. ㅋㅋ전부 다 언 게 아니라고...? 계속해서 강을 건너가다 보니 녹아있는 구멍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구멍에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산책을 즐기고 있다. 분명 알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는 걸까? 사람의 인식이란 역시 대단하다. 역시 믿을만한 강추위의 나라 러시아다.



크리스마스 플리 마켓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광장이 나왔다.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질릴 법도 한 얼음 미끄럼틀이었는데, 꽤 대도시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커다란 얼음 미끄럼틀이다. 하지만 타고 싶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큼직큼직한 조형물들이 많았지만, 얼음 조각이라면 여태 볼만큼 봐왔다.


하지만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크리스마스의 플리마켓이었다. 안락한 통나무 집들이 늘어진 거리는 크리스마스 마을 같았다. 초입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우리를 반겼다. 플리마켓에서 우리는 아기자기한 러시아의 전통 인형들과 장식품, 기념품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따뜻한 핫도그 가게 앞에 서서 몸을 녹이며 도넛과 핫도그를 집어 들었다.


크리스마스 플리마켓 밖으로 나오는 찰나, "뎅~" 하는 웅장한 종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이 넓은 거리를 가득 채우는 웅장한 종소리에 전율이 흘렀다. 종이 울리는 곳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시 관공서였다. 관공서에서는 오후 5시를 알리며 종을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종이 울리는 관공서를 바라봤다. 러시아는 아름다운 건물에 참 조명도 분위기 있게 설치해 놓았다. 아름다운 건물이 조명에 비쳐 화려함으로 빛이 났다. 다섯 번의 종소리가 끝나고 나니, 다시 시끌벅적한 주위 잡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는 동안은 왠지 다른 세상에 있었던 것만 같다.



장기여행에 우리는 지쳐갔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번화가로 들어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딘가의 로데오거리와 같은 느낌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의 열정이었다면, 다리가 부서질지라도 모든 거리를 구경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구경한답시고 "조금만 더 가볼까?" 하며 거리를 걷다가 다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친구들도 그나마 식은 나의 열정을 말리느라 애썼다. 예카테린부르크에는 'BLACK STAR'라는 햄버거가 유명하다고 한다. 또 햄버거다. 하지만 딱히 먹을만한 맛있는 음식이 없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한국음식이다. 한국에서는 뭘 먹더라도 실패하는 일은 거의 없다.


꽤나 큰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꽤나 위험했다. 이전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앵벌이가 보였고, 소매치기가 있다는 정보들이 들어왔다. 햄버거집 안의 직원은 앵벌이를 하러 들어오는 아이들을 막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유명한 햄버거 집이라서 그런지 가격은 싸지 않다. 하지만 나오는 햄버거도 그렇게 큼지막하지는 않았다. 맛도 뭐 보통의 햄버거 맛이다. 여행 기분으로 먹는 맛일 뿐, 한국에 돌아가면 버거킹으로 달려가 콰트로 치즈 와퍼세트를 먹게 될 것 같다. 그게 정말, 햄버거지.


식사를 마치고, 짧은 열차에 오르기 전 약간의 알코올을 보충하고 싶었다. 우리는 'Kill Fish bar'라는 험악한 문구의 펍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왠지 무서운 유흥주점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반대편의 젤리 가게에 들어가 몇 개의 젤리를 고르며 종업원에게 반대편에 있는 가게가 안전한 곳인지 물었다. "Kill Fish bar~"하며 방긋 웃음과 함께 엄지를 치켜드는 종업원에 힘 입어, 우리는 가게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생선요리를 파는 가게였다. 자리 안내는 없었다. 인종차별..? 은 아닐 거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열었다. 꽤 비싼 가격의 요리주점이었다. '잘못 들어왔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더 이상 다른 장소를 찾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맥주를 하나씩 고르고, 가장 싼 메뉴를 하나 골랐다. 생선 샌드위치였다. 세상에 오늘은 아침, 점심, 저녁 내내 빵만 먹고살았다. 아주 죽을 맛이었다. 주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문을 하려고 하니, 종업원은 노란색 카드를 가져오라는 듯 카드 한 장을 흔들었다. '... 아니 어디서 가져오는 건데요...' 하지만 고맙게도, 옆에 있는 종업원이 그냥 해주라는 듯한 눈치를 보냈다. 우여곡절이 따로 없다.



지친 여행의 하이라이트.


맥주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갔다. 우리는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플을 통해서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택시는 도통 우리에게 오지를 않는다. 어플을 통해서 택시의 위치를 볼 수 있는데, 대체 택시가 오고 있는 건지, 휴대폰이 먹통인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택시의 번호판을 확인하며 택시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성진이가 말했다. "너무 추운데, 저기 건물에 들어가 있어도 돼?", 성진이의 말 한마디에 너무 화가 나서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열심히 택시를 잡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

택시 위치를 확인하니, 분명 우리 앞에 있어야 할 택시였다. 곧 택시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온갖 러시아어가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관공서 앞으로 다가가, 직원으로 보이는 어느 남성에게 죄송하다며 휴대폰을 건넸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관공서의 직원은 전화를 끝내고, 우리를 택시 앞으로 데려다주셨다. 오늘 만난 첫 행운의 주인공이시다ㅠ. 택시를 보니 우리가 택시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했다. 어플에 나오는 번호판과 실제 택시의 번호판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휴, 택시기사는 꽤나 화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화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택시는 조용히 달렸고, 얼마 뒤 예카테린부르크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릴 때가 되자 황당하게도 택시기사는 어플의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을 요구했다. 어이가 없었던 나는 당연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택시기사는 화난 표정으로 소리치며 자신이 우리를 기다려준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것 같았다. 사실, 그 정도를 감안하면 낼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었다. 고작 40 루블 한화로 500원 돈이었으니까. 어떻게 할지 물어보기 위해 성진이를 쳐다봤다. 성진이는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택시에서 내려 휴대폰을 쳐다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40 루블을 내기 싫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지폐를 내야 하는데, 그러면 동전이 아주 많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실랑이로 스트레스받기 싫었던 나는 그냥 40 루블을 더 주고 수많은 동전을 거슬러 받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기가 싫어졌다. 인웅이 형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성진이는 상황 파악을 하지도 못한 채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넸다. 물론 다들 지쳤겠지만, 오늘 하루는 같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여행객을 끌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혼자 올 걸...'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은 하루였다. 나의 침묵은 열차와 함께 새벽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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