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의 근교도시를 향하여.

by 혁꾸

횡단 열차 그만 탈래...


열차에서 아침을 맞은 후, 밥을 먹고 3시간 정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독함이 가져다주는 낭만도 한계를 드러냈다. 지루해 죽겠다 정말.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지막 영화를 관람했다. 기가 막히게도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쯔음 우리는 카잔 역에 도착했다.



망가진 휴대전화


예카테린부르크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러시아 속의 또 다른 자치공화국인 카잔. 여태까지 본 기차역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건축물이었다. 갈색 벽돌로 만들어진 하나의 성은 한눈에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랐다. 우리는 카잔 역 건너편에 있는 휴대폰 대리점을 향했다.


열차 안에서 휴대폰이 점점 먹통이 되기 시작하길래 휴대폰이 신호가 잘 안 잡히는구나 했더니, 옆에 성진이와 인웅이 형은 신나게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다 보니 내 휴대폰이 망가진 건지, 신호가 안 잡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휴대폰 대리점으로 들어가 유심이 안 터진다고 말했더니, 새로운 유심을 구매해야 한다고 한다. 가격은 500 루블. 따로 기다리는 시간 없이, 휴대폰을 건네주면 유심을 갈아 끼워준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기가 더 용이하다.



선착장 배표 예약하기


참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눈이 내리는 걸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돌아오면, 거리에 눈이 조금씩 쌓여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눈밭인데, 나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허, 눈은 대체 어디서 생기는 걸까?


카잔은 꽤나 우중충한 날씨였다. 여행에 지친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거리에는 먼지 뭍은 축축한 회색 빛의 눈들이 쌓여있다. 캐리어를 가지고 버스에서 내리다 반쯤 녹아있는 회색 눈더미에 실수로 발을 집어넣는 상상을 했다. 아마, 신발은 지저분한 눈으로 가득 차겠지. 참으로 끔찍한 하루가 될 것이다.


숙소를 체크인하기 전, 내일 여행할 카잔의 근교 유적지 '볼가르'에 가기 위해 카잔의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안내 방송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휴대폰의 지도를 계속 최신화시키며 위치를 뚫어져라 확인했다. 참고로 카잔 선착장은 회차지점, 버스의 마지막 역이다. 마지막 역에 도착하자 버스의 하차문이 열렸다. 버스와 인도 사이에는 반쯤 녹아 축축이 쌓여있는 눈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하하, 캐리어를 들고 점프하기엔 분명 역부족일 것이다. 그렇다고 캐리어를 던질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버스의 끝자락에서 인도로 다리를 최대한 길게 뻗으며 발을 던졌다.

"푹-"... ㅋㅋㅋ그럼 그렇지. 발목까지 시원한 얼음으로 들어차버렸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선착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분명 여기가 맞긴 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본 사진과 같은 건물이 눈 앞에 있었으니까. 컨테이너처럼 생긴 파란색 건물이었다. 문 앞을 기웃기웃거리다, 문고리를 당겼다. 문은 열려있었다. 확실히 매표소가 맞았지만, 창구의 문은 전부 닫혀있었다. 일찍 오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다고 하던데, 너무 늦어버린 탓일까. 그때, 직원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우리는 바로 아주머니께 여쭸다. "볼가르로 가는 표 있나요?" 직원 아주머니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셨다.


내일 아침에 표가 없을까 봐 카잔에 도착하자마자 선착장을 찾았는데, 우리는 표를 구하지 못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차질이 생긴 계획에 미련이 크게 남아,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고 싶었지만, 일단 추위부터 피하고 싶었다. 아까 눈 구덩이 속에 처박힌 발이 동상에 걸릴 것만 같았다.


선착장에서 다시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도 버스 정류장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았었다. 이번 숙소는 정말 다행히도 1층이다 ㅋㅋ, 아마 러시아에서 엘리베이터 사업을 한다면 크게 성공할 것 같다. 러시아에서는 높은 층의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한숨을 쉬고 있는 여행객들을 섭섭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하게 샤워를 한 뒤에 점심을 먹기 위해 나왔다. 우리는 숙소 바로 앞의 '찹찹'이라는 뷔페식 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흠, 러시아의 뷔페식 식당은 먹을 음식을 먼저 전부 접시에 담은 후, 한 번에 계산하는 시스템이다. 볶음밥, 갈비, 피자, 빵, 수프 등 많은 음식이 있었지만 솔직히 맛은 그저 그렇다. 그냥 살기 위해 먹는 정도? 음식을 먹는 동안 애슐리가 생각날 뿐이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다시 선착장을 찾았다. '볼가르'는 갈 수 없지만, 또 다른 근교 도시 '스비야쥐스크'라는 요새로 만들어진 섬으로 가는 배편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스비야쥐스크로 향하는 배표 또한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겨울철에는 아예 배를 운항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핫 참, 이렇게 헛수고로울 수가 있나~.


*카잔 선착장은 겨울철에는 운항하지 않는다.



내 여행 사전에 포기란 없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숙소에 들어가 호스트에게 근교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니, 게스트하우스 내에서 가이드를 연결해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내일 오후나 돼야 연결해줄 수 있다는 말에,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밤이면 우리는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근교 도시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한다.


알아보니 카잔의 버스터미널을 이용하여 갈 수 도 있었고, 여려 명의 여행객이라면 택시를 이용해서 갈 수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카잔에서의 시간은 고작 1박 2일이었다. 배편을 이용하면 꽤 여유로운 일정이었지만, 육로로 가기에는 편도로만 4시간이 넘게 걸리거니와, 지칠 대로 지친 우리의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버스 터미널까지만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져가며 겨우 "Yuzhnyy"라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냈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지도에 검색했더니, 가까운 곳에 정류장이 있었다. 정류장의 위치는 크렘린 궁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엥? 궁 안에 터미널이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에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지도를 따라 걸으며 크렘린 궁에 도착했다. 어차피 구경 올 크렘린궁이었지만, 이렇게 급하게 방문하게 될 줄이야. 크렘린의 성벽을 따라 아주 커다란 성의 입구를 만날 수 있었다. 방문객이 거의 없었다. 성문을 통과하려는데 창구 하나가 보였다. '돈을 내야 하나?' 싶어 직원에게 혹시 공짜냐고 물었더니, 방긋 웃으며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크렘린의 성벽을 넘어왔더니, 눈 앞에 중세시대의 모습들이 펼쳐졌다. 성벽 뒤에는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과 성벽 위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평화로워 보이는 건물들의 하얀 벽들과, 밤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조명이 비친 파란 돔들, 길을 따라서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크렘린의 아름다운 역사가 묻어나는 모습들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버스 터미널을 찾아다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에 다다랐고, 눈 앞에는 카잔의 야경이 펼쳐졌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크렘린 궁은, 언덕 아래 카잔의 도심과 제방, 관공서 농민 궁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을 넘어 건너편에는 알록달록한 조명의 대관람차와 반가운 기업 'KIA'가 보였다.


아참, 나는 버스 터미널을 찾으러 왔었다. 지도의 위치에는 버스 터미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크렘린 궁의 성벽이었다. 혹시 크렘린궁 지하에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가는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하,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나가는 러시아인을 붙잡고 웃으며 번역기를 들이밀었다. 나는 아주 친절한 러시아인을 만났다. 이곳에 버스터미널은 없다고 한다. (지도가 나를 속였다.) 그러면서 지도를 통해 버스터미널의 위치를 내게 알려줬다. 게다가 터미널에 전화까지 해주며,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볼가르'로 향하는 버스가 있는지 물어봐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얘기가 잘 안됐는지, 버스터미널의 위치를 알려주며 더 이상 자기들도 모른다는 듯한 말투와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이들도 카잔으로 여행 온 러시아 여행객이었다.


버스터미널은 강을 건너서도 꽤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 티켓을 미리 사러 가기엔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아마, 내일 아침 가기에는 더 부담스러운 거리겠지. 오늘부로, 내 여행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를 새기기로 했다.


혁구의 여행 사전

'포기' (명사) : 모든 노력에도 어쩔 수 없다면, 호텔 침대에서 푹 쉬며 지친 여행 에너지를 보충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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