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궁에서 펼쳐지는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하늘에 주황색 불빛이 물들어 있었다. 솥뚜껑처럼 보이는 카잔의 서커스장의 조명이 하늘에 비치고 있었다. 캄캄한 하늘에 조명이 비쳐 보이는 주황색 구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카잔 특유의 밤하늘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어느 사거리, 숙소의 반대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행의 호기심에 또다시 이끌렸다. 어느 공원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도심 속의 스케이트장이 펼쳐졌다. 늦은 저녁시간, 빙판에는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 놀러 나온 가족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옆에는 스케이트 대여소도 자리하고 있었다. 한치 고민도 하지 않고 스케이트를 빌리러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대여소의 영업시간은 10분이 채 남지 않았었다. 대여소가 문을 닫아도 스케이트는 탈 수 있었다. 개인 스케이트가 있다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공원의 스케이트장은 인공눈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원의 호수가 차갑게 얼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이었다. 너무 늦어버린 시간에, 우리는 아쉬움을 머금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오후가 시작되고서야 잠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 있었던 계획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까. 포기하고 나니까, 여행이 한결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하루 종일을 침대에서 보낼 순 없지. 느긋이 샤워를 한 후, 숙소에서 나왔다.
우리는 다시 검은호수로 향했다. 여전히 검은호수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스케이트장 끝에는, 몇몇 사람들이 피겨스케이팅을 즐기고 있었다. 티비에서만 보던 트리플 액셀을 실제로 보는 순간이었다. 집 앞 공원에서 피겨스케이팅을 구경할 수 있다니, 되게 신기하다. 우리는 대여소로 들어가 스케이트를 빌렸다. 혹시 몰라 가져온 국제 학생증이 빛을 발했다. 무려 20 루블 350원가량을 할인받았다 ㅋ.
우리는 검은 호수의 넓은 스케이트장을 달렸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를 빠른 속도로 헤쳐 다니니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외국의 어느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또 다른 신선한 기쁨이었다. 몇 바퀴를 내리 쏘다가, 힘이 들어 잠시 쉬기 위해 스탠드에 앉았다. 옆에는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러시아의 꼬마 남자아이가 스케이트를 갈아 신으며 앉아있었다. 탱글탱글한 볼살이 귀여워 바라보다가 눈이 맞아 싱긋 웃음 지었다. 꼬마 아이도 나를 보며 씩 하고 웃음 짓더니, 이내 양손의 검지로 눈을 가늘게 찢었다.... X새끼
놀다가 지친 우리는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검은 호수를 나서 카잔의 메인 거리인 바우만의 거리로 향했다. 점심식사를 위해 봐 둔 식당이 있었다. 거리를 오고 가며 항상 눈에 들어오던 정원이 딸린 한 오두막 식당이었다. 내부는 우리나라의 호프집과 비슷했다. 우리는 정원이 보이는 창문 아래의 테이블에 앉았다. 러시아에서 한 번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던 메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크림 파스타였다. 크림 파스타와 흑맥주를 주문한 뒤, 실내의 따뜻한 온기에 우리는 몸을 녹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정원 뒤로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길이 일자로 나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노을이 떨어지며 노르스름한 빛이 건물 사이에 번진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해가 떨어지는지, 하지만 노을빛으로 타들어가는 태양을 보는 건 항상 기분 좋은 일이다.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크렘린 제방을 구경하기로 했다. 크렘린의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볼가강으로 연결된 카잔카 강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카잔카 강 앞에서 크렘린 제방을 볼 수 있는데, 여행 후기를 보면 어느 계절에 가던 아름답고 북적거리는 공원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공원이 얼마나 넓은지, 반짝이는 LED로 장식된 성벽들 사이로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공원을 중간에 두고 양 옆으로는 꽤나 고급져 보이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크렘린 제방에 마음속 한편에 숨어있던 동심이 꿈틀거린다.
제방의 끝에는 또 하나의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아까 질리도록 탔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방의 스케이트장은 제방을 따라 아주 길게 뻗어 있었다. 천장에는 별들이 낮게 깔려 물결치고 있다. 스케이트장이 얼마나 길게 뻗어 있는지 신나게 달리는데도 끝이 나오지 않는다. 공원의 스케이트장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지치면, 난간에 매달려 카잔카 강의 야경을 감상했다. 내쉬는 숨마다 입김이 내리 쏟아졌지만, 스케이트 덕분에 심장은 폭발할 듯 뛰고 있고, 허벅지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옆에 성진이를 보니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ㅋㅋ.
스케이트장 중간중간에는 카페와 음식점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식당으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은 스케이트를 타다가 식당 혹은 카페에 들어가 휴식을 즐길 수도 있다. 마치 기다란 고속도로의 휴게소 같은 느낌이다. 스케이트장의 끝을 한 번 다녀왔을 뿐인데도, 30분이나 흘러 있었다. 두 바퀴는 하지 못할 짓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돈도, 스케이트도 아쉬웠던 우리는 설설 스케이트를 타며 한 바퀴 다녀오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다리가 풀릴 줄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로.
하지만 얼른 걸어가야겠다. 1시간 뒤 다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할 예정이다.
카잔은 꽤나 매력적인 도시다, 아무것도 모른채 일정에 맞춰 1박 2일이라는 짧은 여행기간을 계획했지만, 근교 도시와 카잔카강 넘어의 카잔 그리고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이 많았으나, 촉박한 시간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카잔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다. 언젠가 다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여행을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