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사진 파일 용량이 가득 찼다. 애들 여름방학이라 이것저것 찍다 보니 채우는 속도가 더 빨라졌나 보다. 용량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히 찍었더니 어느새 95프로 이상이 찼다며 기존 파일을 지우지 않으면 더 이상의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한다. 불필요한 사진을 삭제하십시오. 아니, 그렇지만 불필요한 사진이라니? 불필요하면 애초에 왜 찍었겠는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용량 100G를 새로 사서 매월 돈을 내고 쓰거나, 파일을 정리해야 한다. 100G를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월정액이라니 임시저장소 느낌이다. 그렇다고 지우는 쪽을 선택하자니 영 그렇다.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찍었는데, 또 억지로 지워야 한다니. 한 장 지워봐야 새로 한 장 찍으면 끝 아닌가.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장씩 천천히 지우다가, 문득 사진을 외장하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돈 주고 사기는 그렇고 남편 외장하드에 같이 옮기기. 사진을 그냥 우르르 옮겨두면 나중에 꺼내보기도 힘들 테니, 간단하게라도 분류하기로 한다. 대단한 분류법은 아니고, 연도별로 나눈 뒤 동영상 사진별로 따로 정리하는 것이다. 동영상을 따로 정리하면 시간이 더 걸리는데 왜 하나 싶지만, 용량을 위해 동영상을 더 많이 지우기 때문에 더 특별한 관리를 하고 싶어 진다.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효율을 위해 큰 품을 들인다. 내 영상과 사진은 소중하니까.(그런데 초점은 안 맞고 진짜 다 못 찍긴 했다. 그래서 ai컴퓨터는 상당수 내 사진을 불필요한 사진으로 친절하게 분류 안내도 해줬다.)
어쨌든 외장하드에 옮기면서도 핸드폰에 옮길 것과 남길 것을 한 장 한 장 구분은 해야 한다. 나름 신중하게 선택하다 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비슷한 사진 동영상을 3,4장씩 찍다 보니 하나하나 보며 고르기가 더 어렵다. 1년 치 정리에 몇 시간씩이다. 유튜버나 편집자들은 언제 이걸 매일 정리하고 있지? 싶다가도
아주 느리게 느리게 패턴이 잡히며 핸드폰 가용 용량이 조금씩 늘어난다. 앞으로는 이렇게 비워둔 공간에 새 사진들이 들어가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내가 정리하고 있는 것은 지난 사진들일뿐인데, 놀랍게도 사진이 정리되면서 나의 지나온 시간과 추억들이 먼지 속에서 보석처럼 뚜렷해지고 마음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10장의 사진 속에서 1,2장만 골라내는데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짐도 아니고 디지털 자료일 뿐인데 왜 마음이 후련해지는 걸까?
여행사진을 정리하며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했던가. 사진으로 그때 갔던 여행지를 대충 훑어보는데, 6년 전인데도 그 잠깐의 순간에 당시의 분위기와 감정 풍경 냄새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평소 한 번도 보지 않던 것인데 사진을 정리하면서 떠올리게 된 것이다. 만약 그냥 대용량 사진첩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다면, 6년 전 어디로 여행을 갔었지라는 사실만 기억할 뿐 그때로 완전히 몰입해서 돌아갔다 오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새삼 느끼건대 사진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면서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계속 보면서 좋은 날을 추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 어릴 때 사진도 마찬가지다. 쓱 쓱 돌아볼 때는 그냥 하나의 사진뭉치였는데, 하나씩 신중히 고르며 소중한 것으로 줄여두니 그 사진을 찍을 때 상황과 추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이사오기 전의 20평 낡은 집과 계단. 어린이집으로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을 참 열심히도 찍었다. 무엇보다 정리를 핑계로 개월별로 성장이 담긴 예쁜 애들 얼굴을 한 번씩 더 꼼꼼히 들여다보니 좋았다.
사진뿐 아니라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겠지. 비우고 줄여야 내 삶을 돌아보기도 좋고 앞으로 채워가기도 좋다. 대용량 저장공간을 추가로 사는 것도 좋지만 일단 가진 것을 비우기로 결심하기 잘했다. 생각보다 굵직하게 남는 기억이 몇 개 없는데 그것은 사진 100장이 아니라 5장만 있어도 충분하다. 우리 삶에 안 중요한 순간은 하나도 없지만, 삶을 되돌아보고 소화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사진도 그런가 보다. 사진을 정리하니 나의 결혼 육아 여행 이벤트데이가 한 번에 정리되는 기분이다.
남편은 메인 클라우드(아이폰사용자 데이터 저장공간)에 남긴 것만 돌아보게 될 거고 나머지는 잊어버리게 될 거라 말했다. 그러니까 한 번에 좋은 걸로 잘 골라두라고. 외장하드에 들어가는 순간 그냥 또 다른 대용량 사진뭉치가 되고, 사진이 어딘가 남겨졌다는 사실만 기억하면서 점점 들여다보지는 않게 될 거라고. 애들이 움직이는 걸 찍느라 흐릿한 사진, 영상으로 틀기에는 짧은 동영상, 사진자료로서 가치가 없는 영상물들은 오늘을 끝으로 이제 모두 안녕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정리 고수가 아니다. 지금 늘 함께하지 않더라도 어딘가 남겨졌다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외장하드로도 모자라 개인 usb까지 더블로 저장해 간직할 것이다. 들여다보지는 않더라도 그냥 나의 추억이 어디 날아가지 않고 거기에 있음에 내가 안도할 수 있도록. 하나가 망가지거나 잃어버리더라도 어딘가에 꼭 남아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안심할 것이다. 그게 나다.
일단 지금은,
무엇보다 핸드폰 용량이 늘어나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