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까지 안 치우나 내버려둬 봤다

by Ms 윤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그래서 생각했다. 주말동안은 진짜 꼼짝도 하지 말고 오로지 먹고 뒹굴기만 하자.

어떤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행동도 없는 상태로,

어떠한 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최소한 움직일 때 움직이더라도 의식적으로 아무 생각을 하지 말자.

배가 고파 요리할 때도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재료를 마구 퍼트리고 치우지 말자.

간단하게 에어프라이어로 돌릴 수 있는 요리를 하자.

설거지도 음식 쓰레기만 버리고 그릇은 물에 담구고 최대한 미루자.

청소고 뭐고 어디까지 쌓이는지 궁금하니 오히려 새로운 체험의 기회다.



평소 치운다고는 해도 늘 지저분한 상태긴 하다.

그러니 더 기분이 나빠서 하기가 싫어진다.

노동이랑 운동은 다릅니다. 유튜브에서 본 이야기에 묘하게 허무해졌다.

버리고 정리하고 금방 원상태가 되고

어제와 똑같은 아무일도 없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무던하게 노력을 한다.



그 차이는 오로지 나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젠 그 티도 안 나는 차이를 알아주기도 싫다.

오히려 경계가 무너져 완전 허물어져봐야 내가 그 동안 뭘 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버틸 것이다. 뭔가를 확인할 때까지. 아니다. 그냥 내가 만족할 때까지.



Unsplash의 stacey-zinoveva


무의 경지에 도전하다


실행 안하기를 실행하는 것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었다.

남편이 출장을 가서 오늘만큼은 미안할 사람도 없고 세상 느긋하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안 편하니 이게 진짜 편한 건지는 몰라도,

끝까지 버티다 보면 몸따라 마음도 적응할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역할놀이를 하고,

나는 간간히 놀아주면서 책을 읽거나 tv를 본다.

간식을 찾으면 사과를 깎아주거나 빵에 잼을 발라준다.

처음 몇 시간은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죽이 잘 맞고,

나는 과일을 올려둔 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리기만 했다.

식탁에 흘린 빵 부스러기, 소파 위의 아이들 옷, 장난감 몇 개. 그 때까진 그냥 소소한 혼란이었다.



혼돈의 현장을 목격하다


하지만 오후가 되어 아이들이 점점 활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장난감이 마치 폭풍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거실 한복판에 장난감이 쌓였고, 바닥에 작게 떨어져있던 레고조각 몇개는

이제 바닥을 빽빽하게 메워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공격수가 되었다.



소파 위는 아이들이 사용한 베개, 담요, 옷이 쌓여간다.

식탁과 바닥을 점령한 장난감과 책, 의자 위에 눌러붙은 크레파스,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새로운 인형들까지.

이제는 아예 필요한 부품을 찾는다고 레고정리함을 뒤집어 탈탈털고 있었다.



늦은 오후쯤 되니 이 악물고 외면하기도 지쳐서 거실 전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살아있는 정글같았다.

나는 잠시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딘가 탐험을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편하게 쉬려고 모든 일을 내버려뒀는데,

오히려 발 디딜 틈 없는 밀림 속에 홀로 떨어진 탐험가가 되었다.



최소한의 개입은 해볼까


결국 손을 든 것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주방을 보고 나서였다.

점심으로 쓰던 그릇이 싱크대 위에 산처럼 쌓였고,

아이들이 간식으로 흘린 과자 부스러기와 컵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이제는 의무감이 아니라 불편함 때문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밥을 먹을 그릇과 수저는 있어야 하니까 식탁만 치우기로 한다.

먹을 자리가 필요하니 의자도 닦는다.

눈에 띄는 얼룩만 닦아내고, 흩어진 종이나 장난감은 식탁 옆에 밀어둔다.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고 선을 그어둔 채, 최소한의 질서 속에서 밥을 먹을 준비를 마친다.

꼭 필요한 공간만 정리했을 뿐인데, 그 안에서 앉아 있으면 나름의 단정함이 느껴졌다.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밥을 먹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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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니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필요한 만큼 조금만 치우자. 했다가 그 필요한 만큼의 영역을 조금 늘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식탁만 치웠는데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가 눈에 밟히고, 바닥을 닦고 나니 건조기에 남은 빨래가 마음에 걸렸다.

'딱 여기까지만'이라 정해두었던 경계가 슬금슬금 뒤로 밀려나면서, 결국 더 넓은 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한참 쉬어서 갑자기 에너지가 생겼는지 이번에는 어디까지 잘 치웠나 시험해보고 싶은 느낌?

마치 스스로와 게임을 하듯, ‘여기까지는 해도 괜찮겠지?’ 하며 경계를 조금씩 넓혀간다.

그러다 보면 식탁만 치우려던 계획은 어느새 거실, 부엌, 현관까지 뻗어 나가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지런한 버전의 내가 잠깐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눈에 거슬리던 화장실 청소까지 밖밖하다보니

오늘 내가 쉬려고 했던 게 진짜 맞는가? 싶어졌다.

원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늘어진 하루를 보내려 했는데, 정리된 집 안을 둘러보니 또 묘하게 뿌듯하다.

쉰 건지, 일한 건지 헷갈리지만 적어도 눈앞은 환해졌으니 그게 오늘의 방편 같았다.



버티고 쉬어서 얻은 힘


사실 치우지 않는다는 건 나라는 사람의 경계가 어디까지 허물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집은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아서, 내 심리상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미룬다는 건 결국 나와 집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일이다. 내가 줄을 놓는 순간, 집은 순식간에 나를 덮쳐온다.

먼지가 쌓이고, 빨래는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냄비는 나를 조용히 압박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싸움은 집과 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쉰다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그저 할일을 이연시키는 것뿐.

나는 어디까지 미룰 수 있나 참아봤을 뿐이다.



참아봤자 결국 내가 할 일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마음만 더 불편해졌다.

미뤄둔 빨래며 설거지며 쌓여 있는 물건들이 시야 한쪽에서 꾸준히 나를 압박했고,

‘조금만 참자’고 다짐했던 마음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아무리 버텨도 집안일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잠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마음속 부담만 점점 커져, 편히 쉬고 싶었던 의도와는 정반대로, 더 긴장된 상태로 나를 만들고 있었다.



이 일더미를 내일의 나에게 맡기는 것보다 오늘의 내가 해버리는 게 낫긴 하잖아?



그나마 한가지 수확이 있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순간이 있어야 다시 뭔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다.

결국 내가 할 일이더라도 잠시나마 눈을 가리고 나를 내버려둬야 뭘 할 힘도 생긴다는 걸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다 때려칠 기세로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었는데,

뇌가 진짜 잠깐 속아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계획도 없는 상태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움직일 힘을 주었다.

치우지 않고 버텼던 시간이 헛된 게 아니라, 되려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기초 체력 같은 게 되어 있었다.



Unsplsh의 dinh-ng


작은 틈이 주는 에너지


그리고 어느 정도 이상의 꽉 찬, 통제 불능 상태로 넘어가고 나면, 오히려 작은 틈구멍 하나만 만들어도 속이 시원해진다는 걸 알았다.

한쪽 구석, 사소한 한두 가지 일만 먼저 처리해도, 그 작은 틈이 다음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완벽하게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작은 빈칸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전체의 흐름이 훨씬 매끄러워지고, 생각보다 많은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즉,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는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할 기세로 뇌를 속이고 있어야 오히려 다시 할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작은 틈을 하나씩 만들어가며 정리해 나가기 시작하면, 어느새 한결 정돈된 상태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완벽하게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잠시 내버려둔 시간과 작은 틈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오늘의 깨달음은 단순하지만 확실하다. 미루고 쉬는 순간도, 계획 없이 시작한 작은 틈도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



정말로 힘이 들 땐 언제든 다시 던져버리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은 틈을 만들며 시작하는 순간이야말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된다.






(배경사진 - Unsplash의 jason-l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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