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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의 공간 Oct 22. 2023

서촌 누와에는 거대 가습기가 있다.

뜨거운 물을 담고 입욕제를 풀면 향기나는 가습기 완-성



서촌에는 통인 시장이 유명하다고 들었다. 심지어 줄 서서 먹는 에그타르트 가게명도 통인 스윗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 집 근처에도 적당한 규모의 시장이 있었고,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가봤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옛 간판을 보자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한 장 찍었다. 문득 시안에는 얼마나 다양한 흔적이 있을지 궁금해져서 결국 시장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떡과 과일, 고기, 전통과자 등 음식들은 우리 집 근처 시장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즐거웠다. 바닥에 늘어놓고 파는 채소와 생선들마저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장을 볼 때 시장이나 마트보다 온라인을 주로 이용해서 이런 풍경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장은 마트보다 훨씬 좁고 어지럽고 사람들과 더 많이 부딛치는 곳이었다. 사람들과 몇 번 부딛치니까 금세 피곤해져서 얼른 빠져나왔다.



날이 완전히 깜깜해지기 전에 누와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한 시간에 보는 누와는 따뜻한 조명 덕분에 밖에서 볼 때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디어 누와에서 가장 유명한 스팟인 동그란 창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삼각대를 설치하는데 생각보다 마당이 좁고 자갈밭이라 바닥이 고르지 못했으며, 내 삼각대가 동그란 창을 찍기에는 턱없이 낮았다. 결과물은 아쉬웠지만 혼자라도 이렇게 멋진 사진을 찍은 내가 기특했다.




누와의 또 다른 시그니처는 커다란 욕조였다. 누군가 누와에는 거대 가습기가 있다고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이 숙소에서 꽤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번도 욕조가 있는 집에서 산 적 없는 나로서는 여행가면 늘 욕조가 있는 숙소를 원하곤 했다.



욕조의 수도꼭지와 물줄기가 나오는 통로까지 전부 특이한 소재였다. 누와 곳곳에 인테리어 요소로 쓰였던 돌과 소재가 같았다. 게다가 욕조 주변은 제주도의 작은 정원을 떠올릴 정도로 정갈한 돌밭이었으며, 족욕할 때 쓸 수 있는 베스 소금과 방수 책도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너무 조금씩 떨어졌다. 이 큰 욕조에 물을 받으려면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았다. 일단 샤워라도 할까 싶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는데 욕조에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샤워기를 끄지 않고 나가서 확인해보니 안 그래도 조금씩만 나오던 물줄기가 더 줄어있었다. 잠깐 멍하다가 피식 웃었다.



어느정도 물이 차올라서 입욕제를 꺼냈다. 유명한 브랜드에서 제법 비싸게 주고 샀다. 나를 위한 사치랄까. 한 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입욕제는 분홍색과 보라색, 그리고 노란색과 하늘색 등 다양한 색이 섞인 행성 같기도 했다. 물 안에 입욕제를 던져 넣었다. 입욕제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그 주변으로 거품을 내뿜다가 넓은 물 속으로 퍼지면서 사라졌다.

욕조 주변으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손으로 몇번 물을 휘저었는데 물 온도가 딱 적당해서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 아직 덜 녹은 입욕제 조각이 떠다녔다. 입욕제를 손으로 잘게 부셔서 물 안에 녹여냈더니 입욕제 색깔이 손에 묻어서 살짝 붉어졌다. 욕조 물로 몇 번 씻었는데도 아직 그대로였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점점 나른해졌다. 몸에 긴장을 풀고 완전히 욕조에 앉자 아까 낮에는 못 봤던 풍경이 보였다. 낮에 통유리 문에 블라인드를 쳤는데 아래에 미쳐 가리지 못한 부분이 보였다. 까만 밤이라서 바깥이 잘 보이지 않으니 혹시 누군가 마당으로 들어와서 내가 목욕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내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곤 했다. 바로 욕조 밖으로 나가 바닥 끝까지 블라인드를 내렸다.

노트북을 가져와서 요즘 잘 보고 있는 드라마를 틀었다. 따뜻한 물 속에서 드라마를 보니까 아주 잠깐 이곳을 집으로 착각했다. 낯선 공간이라도 내게 익숙한 것을 가져오면 훨씬 적응하기가 쉽다는 걸 다시 또 깨달았다.



한 편을 다 보고 나니 추워졌다. 물이 식은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틀려다가 그냥 욕조 끝에 있는 물마개를 빼냈다. 잔잔하게 움직이던 물이 물마개 주변으로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손가락이 살짝 저릿해서 보니까 양쪽 다 쪼글쪼글했다. 아까 붉게 물들었던 손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얗게 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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