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반도체 품귀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올해엔 반도체 대호황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요. 이런 전망을 방증이라도 하듯 자동차부터 모바일 통신기기, TV 업계까지 반도체가 부족해 생산을 줄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다 보니 이제 반도체 업체도 가격을 올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왜 갑자기 이렇게 반도체가 부족해졌는지, 여기에 업체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반도체 왜 이렇게 부족할까?
작년부터 올해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반도체 업계는 수요의 변동과 업체의 재고 수준에 따라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데요. 올해엔 반도체 수요가 커지고 재고가 줄어들면서 반도체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전망이 현실화하고 있는데요. 작년엔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비대면 수요가 커짐에 따라 우려했던 만큼 반도체 수요가 크게 줄지 않은 데다가, 올해엔 백신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IT업체와 자동차 업체는 올해 경기회복을 예상하며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5G와 AI 기술 등 첨단 기술이 기기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반도체에 요구되는 성능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요.
반도체 성능의 가늠자는 집적도입니다. 작은 반도체에 회로를 얼마나 더 얇게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요. 삼성전자와 TSMC가 이 초미세 공정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실상 삼성전자와 TSMC를 제외하면 7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해낼 수 있는 기업은 없습니다. 초미세 공정을 위해선 웨이퍼에 최대한 얇게 회로를 그려낼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필요한데, 이 장비를 만드는 회사가 전 세계에 네덜란드의 ASML 한 곳 밖에 없는 데다, 매년 40개 정도밖에 생산하지 못한다고 하죠. 장비 한 대가 3,000억 원이 넘고, 생산공정 구축에만 10여 대의 EUV 장비가 필요하기에 그나마 장비를 확보한 삼성전자나 TSMC도 생산 공정을 쉽게 증설하기 어렵습니다.
1년 치 주문이 끝났다는 파운드리
모든 반도체가 초미세 공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마트폰과 PC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와 CPU, 딥러닝에 활용되는 GPU, 일부 차량용 반도체가 초미세 공정으로 생산되는데요. 기기의 성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고성능 반도체의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이런 반도체들은 대부분 반도체 설계 업체들이나 기기 제조 업체들이 직접 설계한 후 TSMC와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 업체에 위탁 생산을 하게 되는데요. 세계 1, 2위의 파운드리 업체인 TSMC(55%), 삼성전자(16%)는 이미 1년 치 주문이 모두 끝나 반도체를 받으려면 최소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슈퍼 호황에 파운드리 업체들은 설비 증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파운드리 업계의 압도적인 1위 TSMC는 올해 약 30조 원을 설비에 투자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대만 기업들은 총 40조 원 정도를 쏟아부을 예정입니다. 작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TSMC에 2위 자리를 내준 만큼, TSMC에 맞서 파운드리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선 지금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견해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삼성전자는 28일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보이는데, 약 30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부터 텍사스의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에서 인텔의 메인보드 칩셋 생산을 시작할 예정인데요. 비교적 부가가치가 적은 품목이긴 하지만 인텔과의 협업이 시작됐다는 데 의의가 있단 평가입니다. 삼성전자는 인텔의 추가 물량 수주를 위해 약 11조 원을 들여 오스틴 공장의 증설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반도체 수요가 공급을 훌쩍 뛰어넘은 상황이지만, 설비 투자를 늘리기도 어려워 파운드리 호황이 향후 5년 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반도체 때문에 줄줄이 생산을 줄이는 제조업계
반도체 수요는 계속 증가하는데 공급이 빠르게 늘지 못해 반도체를 못 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데요. 특히 AP, CPU, GPU와 같이 고성능 반도체보다 마진이 낮은 차량용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용 반도체는 생산이 후순위로 밀리면서 물량 확보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차량에도 수백여 개의 반도체가 들어가고, 전기차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더 많은 반도체가 필요해졌죠. 전기차에는 기존 내연기관 차보다 2배 많은 반도체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할 경우 2,000개가량의 반도체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데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지난해 중국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제재를 가하면서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SMIC의 반도체는 기술 수준이 그렇게 높진 않지만, 차량용 반도체나 가전기기에 탑재되기엔 충분한 수준이었죠.
차량용 반도체 부족에 미국의 포드 자동차는 공장을 일시 중단했고, 폭스바겐, 도요타, 혼다, 닛산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도 반도체 부족으로 줄줄이 감산에 나서고 있습니다. 반도체 때문에 자국의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질 위기에 처한 미국, 독일, 일본은 파운드리 업체들이 대거 포진한 대만 정부에 반도체 증산을 요청하기도 했죠. 반도체 증산을 위한 설비 투자 기간을 고려하면 최소 올해 말까지는 반도체 부족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게다가 가뜩이나 생산에 바쁜 파운드리 기업들은 여전히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 후순위에 두고 있죠. 이러다 보니 차량용 반도체 생산 업체들은 반도체 가격을 최대 20%까지 인상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비슷하게 통신장비나 TV 같은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도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가격이 올라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쁨의 비명 지르는 반도체 업체, 향후 전략은?
구조적인 반도체 부족 현상이 본격화하면서 기업들과 각국 정부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습니다. IT업체와 가전업체들은 반도체 재고를 확보하느라 분주하고, 강대국들도 아시아의 반도체 생산국에 반도체 증산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미국 자동차정책위원회는 미국 상무부에 아시아 반도체 업체들의 반도체 쿼터를 조정해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늘리도록 압박을 가하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사실 반도체 업체들도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늘릴 유인이 부족한데요. 5G 스마트폰 하나에 들어가는 AP와 5G 모뎀칩 가격만 30만 원에 달하지만, 내연기관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 백여 개의 반도체 총가격이 40만 원이 채 안 되기 때문입니다.
TSMC와 삼성전자 모두 수십 조 단위의 설비투자를 단행하며 늘어나는 수요에 대처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이런 이례적인 공급 부족이 최소 1~2년 이상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요. 최근 이재용 부회장이 다시 구속되면서 장기 투자에 관한 리스크가 커졌지만, 차량용 반도체가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을 기회 삼아 차량용 이미지 센서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테슬라의 자율주행차에 들어갈 5나노 차량용 반도체 개발도 진행하고 있죠. 올해엔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비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고, D램을 비롯한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견조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슈퍼사이클 속에서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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