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그렇게 참을성이 크다

<검은 개>, 이언 매큐언

by 바람

2001년 세계무역센터의 건물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영화가 아닌 현실로 그 두려움과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왔다. 누군가 자신이 그 일을 저질렀다고 선언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오고 공포는 꼬리를 물고 더 큰 공포로 따라왔다. 영화 <마이 네임 이즈 칸>에서, 주인공 칸의 평온한 일상은 한순간에 파괴된다. 자신이 폭력의 주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길은 나선다. 고집스럽고 단호한 그의 외침은 마침내 인정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선이 선임을 증명하는 길은 그렇게 어렵다.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1946년, 세상은 평화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타락이 교묘하게 숨어있던 이 시기에 행복한 출발을 꿈꾸며 자유를 시험하고 싶은 공산주의자. 준과 버나드의 앞날은 꽃길처럼 보인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땅은 폐허가 되었으며 강제수용소의 참상은 뉴스에서 들리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신혼여행지에서 준이 ‘검은 개’를 보았는지, 버나드가 준의 말을 믿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준이 ‘검은 개’를 통해 악을 체험하고 신의 존재를 믿게 된 사건과 그를 통한 준의 변화는 개인의 발버둥처럼 보인다. 준은 검은 개와 마주한 사건을 얘기하며 공포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말하지 않는다. 검을 개, 즉 악이 발현되어 어떻게 세상에 뿌리내리고 사람들에게 침투하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얘기해줄 뿐이다.

“나는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도 어둠이나 죽음의 아름다움,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소리죽여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 ……비극의 세계가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 거대한 질서의 운동이요, 생을 절실히 사랑하는 애정의 소산임을 확신한다.” (김원일,<오늘 부는 바람> 후기 중)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와 악이 덮칠 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대상은 순수하고 어린 영혼들이다. 준이 만난 공포와 제니가 마주한 현실을 통해 악의 발현 양상을 드러낸다. 사진 속 준의 순수한 모습은 악과 맞서 홀로 이겨내는 과정을 거치며 완고한 미소와 단호한 자기견해로, 미래에 대한 과학적 낙관주의로 그녀의 영혼을 재탄생시킨다. 버나드의 진보가 ‘계속 새로운 옷을 입어 탈바꿈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준의 행보는 나약한 개인으로서는 절망의 행보이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을 사랑했고 어둠과 죽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자 노력한다.


제러미는 1981년 문화 사절단 일원으로 초청받아 폴란드에 간다. 그곳에서 준의 딸 제니를 만난다. 일행은 유일한 여성인 제니를 희롱 또는 유희의 대상으로 주목하지만, 제니는 제러미에게 유대인 학살 수용소를 방문하자고 부탁한다. 수용소 정문의 안내문을 보며 제니는 말한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렇죠? 아직도 진행형인 거예요. 그게 정부의 입장이고요. 검은 개인 거네.”

여성과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아직 진행형이다. 제니는 그것을 '검은 개'라고 규정한다. 희생된 생명은 값싼 것이고 쓰레기일 뿐이다. 실재했던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는 관광객처럼 거닐 뿐이라고 제러미는 말한다. 아직도 우리는 희생된, 값싼 생명을, 그저 관광하듯 보고 있지만은 않은지…….

준의 삶에서 남편인 버나드는 어떤 존재일까. 버나드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화해를 꿈꾸지만 준은 모든 것을 차근차근 포기한다.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준은 불편해한다. 이런 불편함도 준은 유쾌하게 해석한다. 버나드와 제러미 두 사람에게는 “나를 몹시 화나게도 하고 매료되게도 하는 냉담하고 서먹서먹한 구석이 있”다고. 그들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조금씩 떠나는 과정임에도 준은 용서를 표현한다. 누군가는 죽음의 아름다움을, 절망을 사랑해야 하고 그것이 세상의 질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준은 그렇게 죽음 앞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일찍 부모를 여읜 제러미에게 있어서 준과 그 대척점에 위치한 버나드의 존재는 그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대의의 원칙도 초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회의주의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준의 회고록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제러미가 운명이 자신에게 준 어머니로서 악과 신을 동시에 인식한 준에게 깊이 몰입하는 것은, 준이 만들어 낸 변화로 보인다. 그는 지적 바탕의 대의도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식도 없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검은 개는 영원히 소멸시킬 수 없다. 준이 마지막까지 하고 싶었던 말은 너무 명징하다. 그것을 개인의 경험의 차원으로 좁히면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싹트는 악의 실체를 준과 같이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통해서 발견할 필요는 없다. 준은 모두가 발견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어쩌면 준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룬 단순한 사회를 잘 건사한다면,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수백만 명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준의 꿈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개들은 타락한 상상력이, 어떤 사회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태적인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어. 내가 말하는 악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고 있지.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사적인 생활 속에,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가장 고통받는 건 아이들이야. 그다음엔 조건이 적당할 때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끔찍한 잔혹성이, 생명을 억압하는 사악함이 터져 나오고 모두 자기 안에 있는 증오의 깊이에 놀라는 거야. 그러면 그것은 다시 가라앉아 때를 기다리지.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야.


살아가며 때때로 검은 개의 진화를 목격한다. 때마다 조금씩 더 성숙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악을 어떻게 똑바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마음속 깊이 도사린 증오를 만날 때 세상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1946년 준의 체험은 현재 우리에게도 진행형이다. 참을 수 없게 솟구치는 분노는 테러로, 총격으로, 방화로, 살인으로, 무서운 질주로 나타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준의 말대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룬 사회를 잘 건사해 볼까. 준이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가진 희망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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