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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pr 30. 2020

무상이 그녀를 청소해 버렸다

[서평] 루쉰, <복을 비는 제사>

KBS의 '동행'이란 프로그램을 가끔 시청한다. 어느 때는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이 되는데, 영상을 대할 때는 눈물이 난다.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동행' 같은 생생한 삶을 다룬 작품을 볼 때도 그렇다.


가난의 굴레에 갇힌 이들을 보다 보면 절망에 절망에 절망을 더하는 것 같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끈을 붙잡고 힘겨운 상황들을 간신히 버텨내는 사람들을 보며 차마 숨을 크게 뱉어내지 못하고 가늘게 호흡하며 시청하곤 했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형편인데, 다음 주가 되면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들이 모아진다. 그제야 비로소 묵은 안도의 숨이 한꺼번에 나온다.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나이 들어보니 살면서 누군들 그러한 경험을 한 번도 안 했을까 싶다.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어느 날, 밤이 새도록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다. 만약에...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상황에 수많은 변수를 따져 보았었다. 만약의 상황은 무서웠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쉰의 소설의 인물들도 절망적 상황은 다르지 않다. 급경사의 내리막 길을 구르는 돌덩이처럼 무섭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의 조롱, 비난, 터무니없는 일방적이고 섣부른 판단에 내몰린 여자는 분노하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무수한 언어의 폭력에 매질당하며 살아간다.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생활한다. 밝고 쾌활하던 그녀, 힘이 세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이전의 그녀는 지금은 없다.


첫 남편이 죽고 남겨진 채로 열심히 살아보려 애쓰는 그녀 앞에 죽은 남편의 시댁 쪽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조카며느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그녀가 그동안 일한 품삯을 챙겨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팔아넘긴다.


팔려가다시피 해서 두 번째 남편을 만나고 아들도 낳는다. 열심히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의 이유가 생겼고, 열심히 살았지만 어느 날 남편은 병으로 떠나고 아들을 이리에게 잡아먹힌다. 그녀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전의 그녀는 사라졌다. 사람들의 '찌르는 시선'과 조롱 섞인 말에 그녀는 '찌꺼기'가 되어갔다. 결국 그녀는 죽는다. 사람들은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관심이 없다.


죽기 전날, '나'는 그녀(샹린댁)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완전한 거지꼴이다. 달라진 외모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는 ‘나’에게 그녀는 묻는다.


"글을 아는 분이고, 출세까지 했으니 아는 것도 많겠지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서요..."
"사람이 죽어도 정말 혼은 남나요?"
"있을 것 같네요. ...제 생각에는요."
"그럼, 지옥도 있겠지요?"
"아! 지옥요? 이치로 보면 분명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요. 그런 걸 본 사람이 없으니..."
"그럼 죽은 가족은 다시 만날 수 있나요?"
"그게,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실은 혼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그녀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처음엔 오싹하고 나중엔 스스로가 완전히 바보라는 걸 알게 된다. 질문에 답변은 했으나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그녀의 난데없는 질문에 무슨 다른 뜻이 있을까 생각하지만, 또 자신의 대답이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애써 대화를 지운다.


’나’는 자신의 대답이 무척 중요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한다. 책임을 느낄 만한 중요한 상황이지만, 애써 외면한다.


그날 그녀는 떠났다. 모두가 뱉어내고 싶어 했던 그녀는 떠나기 전 마지막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사람들이 장난처럼 그녀에게 물었던 죄, 두 남편을 취한 죗값으로, 저승에서 받아야 할 벌의 액땜을 위해 그녀는 그간 번 돈으로 사당에 문지방을 시주했다. 그렇게 마지막 죗값을 치렀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듣고 "마침내 무상이 그녀를 깨끗이 청소해버렸다"라고 말한다. 죽은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며 마음마저 가벼워진다. 그녀는 그녀를 싫어했던 사람들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깨끗한 잔인함으로 말할 수 있다니, 저자의 표현이 무심하고 날카롭다.

현세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죽음은, 그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음이 도리어 가벼워졌다.


루쉰의 소설에는 포장이 없다. 거대한 이념이나 철학적 통찰을 말하지도 않는다. 처절한 일상은 정면으로 바라본다. 다음 날이나, 일주일 후의 변화된 모습은 없다. 소설 속 인물의 삶은 포장되지 않는다. 냉정하고 잔인하도록 군더더기가 없다.


무심한 사람들에게 매질당하는 그녀의 고통에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어떤 죄도 없음에, '나'의 대책 없음과 깨끗한 지움에 대해 오히려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음은 무겁고 불편한데 슬프지는 않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일체의 감정을 쏙 뺀 작가의 시선 때문이 아닐까.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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