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서운 김치가 점점 만만해진다

by 바람

아이들 낳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까지 시어머니와 같이 살다 떨어져 살다를 반복했다. 시누이들이 결혼하기 전이어서 어머니는 몇 달씩 우리 집과 딸들이 지내는 당신 집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셨다. 사이가 드러나게 나쁜 고부사이는 아니었어도 '딸 같은 며느리'나 '엄마 같은 시어머니'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시댁은 늘 어려운 것이라서 숨죽이며 지냈다. 그 상황에 배운 것이 있다면 김치 담그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는지, 나의 김치 담그기는 김장부터 시작이었다. 이제 막 결혼한 새댁에게 그해 김장 100포기 담그기. 배추만 100포기였으니 알타리 김치와 깍두기, 파김치와 갓김치, 동치미까지 더해지면 내 생에 그렇게 많은 김치는 7남매가 복닥거리던 식구 많은 친정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을 단독 보조로 옆에서 다듬고 절이고 나르고 무치고를 반복하며 생애 첫 김장을 했었다.


지금처럼 김치냉장고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을 제외하고 겨울임에도 그늘진 곳에 있던 김치독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가 영상으로 오르면서 안의 김장김치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고, 더는 먹을 수 없도록 금방 쉬어 꼬부라졌다. 먹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고 내손으로 버리지는 않았는데 그 많던 김치가 다 어디로 갔는지 세세한 기억이 없다. 여튼, 그렇게 김치가 없어지면 새로 담가야 했다.


첫 김장을 시작으로 미처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겨우내 먹은 김장김치에 물린다고 하며 햇김치를 담갔다. 봄이 온다고 새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해서 담갔고, 누구는 열무김치를 좋아하고 누구는 알타리를 좋아아한다고 담갔다. 김치로 시작해서 김치로 마무리되는 한 해가 일머리 모르는 보조에게는 힘들었다. 그렇게 지켜봐도 발전이 없으니 마음도 고단했다. 해가 지날수록 김치가 만만해지기는커녕 점점 무서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시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때가 되면, 김치를 담그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내손으로는 절대 김치를 담그지 않았다. 어쩌면 못 담그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치가 다 떨어져 없어질 때 지인이나 친정에서 주면 받아먹었고, 그래도 없으면 사다 먹을지언정 내손으로 김치를 담그지는 않았다.


이후로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가며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십수 년을 김치를 담그지 않았다. 아니, 김치를 담그는 것을 회피했다.김치 담그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담그기 싫다는 마음과 무섭다는 마음이 동시에 다가왔다. 허리 건강이 좋지 않아서 수술도 했었기에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던 때였다.



작년에 오랜 직장 생활은 끝났다. 나이도 있으니 김치를 조금씩 담가볼까 싶었지만, 여전히 김치는 무섭고 덤비기엔 부담이 먼저 다가왔다. 그러다 만난 코로나 사태는 나를 다시 김치를 담가 먹는 사람의 길로 이끌었다.


깍두기, 알타리에서 파김치와 열무김치로 조금씩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가족들이 맛있다고 하고 남김없이 먹으니 재미도 있다. 아직 포기김치는 도전하지 않고 있다. 어찌어찌 담글 수는 있겠으나 절이고 씻고 양념 따로 만들어 버무리고 하는 과정은 마음에서도 몸에서도 아직은 버겁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 채소 가게에 열무와 단배추가 연하고 값싼 것이 있어 일단 장을 봤다. 각각 한 단씩 가져온 것으로 다듬고 절였다. 찹쌀가루가 있어 풀도 쑤고 다진 마늘에 새우젓과 액젓을 넣고 매실액과 양파즙도 넣고, 고운 고춧가루와 조금 굵은 고춧가루를 각각 양념에 섞는다. 여러 번 간을 봐야 하지만 보기엔 그럴듯한 열무김치가 완성됐다. 숨이 죽어 김치 통에 옮겨 담고 나면, 그 무섭던 김치가 조금은 만만해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