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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09. 2020

형제 많은 가정,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주말, 서해안 쪽으로 차를 몰았다. 부모님 모신 곳의 톨게이트 팻말을 보며 지나쳤다고 생각했는데, 주차하려고 차를 대는 곳이 너무도 익숙해 보였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바로 5년 전의 그때 그곳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 대신 운전대를 잡고 황당함을 가라앉히며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었던 곳. 모두가 흐느적거리며 출발하는 모습들을 지켜보았었던 곳, 궁평항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 7남매의 맏이로 산 큰 오라버니는 장례가 끝나고 형제들과 의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형제들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통보하듯 말했다. 내용인 즉, 형제들 모임의 치다꺼리에 지쳤다는 것과 이제 다시는 형제들의 모임을 더는 본인이 주선하지도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15년, 아흔둘에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를 모시며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며 지켜왔던 집안의 가장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겠다고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 떠나시면 어머니 안 계신 집에 누구를 보겠다고 자주 찾겠는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자주 들락거렸지만 오빠는 현장에 있다가 이삼일에 한 번 집을 찾았었고 낮에 올케는 없었다. 혼자 계시는 엄마 생각해서 자주 드나들었던 것을 힘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제사나 생신 등의 대소사에는 자연스럽게 형제들은 다 모일 수밖에 없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에게 모든 자녀들이 얼굴을 보여드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식적인 날이니. 그렇게 모인 7남매와 가족들을 챙기고 먹이는 것이 힘들었다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막 떠나신 마당에 나온 그 말이 하도 뜬금없어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선언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다.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는 것 외에 오빠에게 치근댄 기억이 없는 내게는 동생들이 왜 그렇게 지겨웠을까, 묻고 싶었다. 심지어 그 자리엔 오빠의 자녀들, 조카들과 조카며느리도 있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이 민망하여 반박도 못한 채 7남매 형제들의 마지막 식사 모임 장소가 궁평항에서였다.


그날, 오빠의 선언에 쐐기를 박듯 우리 남매들 중 목소리 큰 둘이 크게 다투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 둘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오가는 말의 유치함과 그 자잘함에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부끄럽고 속상했다. 대개의 부부싸움처럼 형제의 다툼도 알고 보면 시비를 가릴 것도 없는 작은 것이 다툼의 시작인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어느 집이든 장례식에서 큰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7남매가 큰소리 없이 장례를 잘 치러내서 내색은 안 해도 나름 우리 형제들 괜찮다, 서로를 배려하는구나, 했다. 그런데, 장례도 무사히 다 끝나고 집안의 기둥을 자처했던 오빠에게서 그런 소리도 들은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곧이어 형제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 사실이, 무사히 지나왔다고 생각하고 안도하고 있던 마음에 뒤통수를 제대로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싸우는 둘을 뜯어말리고 하나를 이끌고 데려간 곳이 바다까지 연결된 산책로였다. 바닷바람에 마음을 식히라고, 둘 사이를 멀게 벌리려고 데려간 곳이었는데, 사람은 많았고 날은 더웠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걸으며, 아직 분이 덜 풀린 하나를 달래며 걷는 그 길에서의 마음은 더운 날씨보다 더 뜨겁게 끓었다.


불편한 마음을 안고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끝 마무리라고 할 것도 없는 파장이, 그날의 산만한 흩어짐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자리에 오늘은 낚시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들은 흔히 세월을 낚는다고 말한다. 그날 이후로 벌써 5년. 우리 형제들이 낚은 세월 속엔 무엇이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오빠의 그 선언 이후로 7남매 모두가 한 자리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셋이 모여 오빠가 있는 곳으로 여전히 찾아갔지만 속 좁은 생각에 흔쾌하지 않은 발걸음과 어색함이 있었다. 처음엔 하나 둘 그 자리에 없는 형제를 세다가 차츰 그냥 그날 모인 숫자를 속으로만 조용히 세보곤 했다.


형제가 많아도 유독 사이좋은 가족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방송이나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영락없이 형제들의 우애가 깊어 보였다. 우리 형제들은 너무 뜨겁다가 어느 순간 데면데면해지고 싸늘해졌다. 지나친 뜨거움의 순간들이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그럴 때면 화목하게 만드는 구조 어딘가가 나사가 하나 풀려 있거나 어긋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그날 이후로 하게 되었다.


마지막 화합의 장소, 형제의 단란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곳, 형제들의 파경에 마침표를 찍고 제각각 흩어지게 만들었던 그 장소에서 지난 5년간의 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다시 시간을 돌려서 큰오빠의 선언이 없었다면, 둘의 다툼이 없었다면, 그날의 어색한 파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우린 여전히 뜨겁다가 싸늘해지는 만남을 쿨하게 여기며 잘 지내고 있었을까.


막내도 오십이 넘어 형제들은 모두 같이 늙어간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밖에 없다는데 우린 구심점을 잃었다. 모두 괜찮은 걸까, 궁금하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개중 속을 나누는 언니와 잠깐 스치듯 얘기했을 뿐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른 집이라고 다르겠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린 결론이자 합리화였다. 그럼에도 그날의 다툼은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목구멍에 걸린 애미한 크기의 가시 같았다. 삼키기도 뱉어내기는 힘든.


이제 와서 싸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게다가 당사자들은 그날의 일을 복기하고 큰 형제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못한 것을, 작은 형제는 큰 형제의 잘못을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형제간에 원망은 있어도 원한은 없다'는데, 되돌릴 수는 없을까. 미련스러운 희망만 아직은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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