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잘 마는 여자

내 영혼의 레시피?

by 바람

“얘는 김밥하고 잡채를 잘 해.”

봄맞이 교회 야유회를 위해 준비할 음식을 의논하던 자리에서 시어머니가 집사님들을 향해 던진 말씀이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더 황당한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내게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 골탕 먹이려는 악취미 아니냐는 얄궂은 표정을 보냈다. 새댁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인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산인지 싶었다. 그렇게 한마디 언질도 없던 김밥을 준비하게 됐다. 잡채는 본인이 하시마고 했다.


결혼을 하고 열심히 교회를 나갔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주례를 맡으신 분이 어머니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었다. 교회는 가건물이었다. 말은 비닐하우스지만 근사한 수목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겨울이지만 잎맥이 단단한 푸른 나무들과 예쁜 꽃들이 곳곳에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었다. 예배를 마치면 모두 모여 같이 식사를 했다. 언제 나와 차렸는지 한쪽에 벌써 반찬 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장정들이 뜨거운 밥솥과 국솥을 옮기면, 사람들은 좌측에서 시작해서 우측으로 줄지어 음식을 담으며 지나갔다. 갓 결혼한 새댁인 나는 손도 빠르지 않았고 음식 솜씨도 없었다. 심지어 낯도 가렸다. 나서지 못하고 남편의 이끎대로 줄 서고 밥을 받았다. 뷔페처럼 큰 접시에 옹기종기 밥과 반찬을 놓고 자리를 찾아 나섰다. 나무 옆이든, 꽃 옆이든, 작은 연못 옆이든 앉으면 야외 정원 겸 카페 겸 식당이 됐다. 예배 본 곳에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정담도 나누었다.


신혼집에서 잔칫상 차리듯 음식 준비가 시작됐다. 김밥 100줄. 음식을 준비하며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는 느낌을 처음 경험했다. 김밥집에서 넣는 대로 재료를 준비했다. 시금치, 단무지, 어묵, 우엉, 계란, 햄. 재료만도 산더미였다. 써는 재료는 썰고, 데치는 재료는 데치고, 볶는 재료는 볶고, 부쳐야 할 것은 부치고 했다. 순서도 계획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쌀을 씻었다. 김밥 100줄을 말려면 얼마만큼 밥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10kg 한 봉지를 커다란 양은 대야에 몽땅 부었다. 여기까지가 야유회 전날 밤까지 해 놓은 일이었다. 두세 시간을 자고 일어나 밥을 10인분 대형 밥솥에 안쳤다. 밥이 되면 꺼내고 소금과 참기름 넣어 휘휘 저어 뜨거운 열기를 식혔다. 김 위에 밥을 펼쳤다. 준비된 재료를 하나씩 가지런히 놓고 말았다. 다시 밥이 되고, 소금과 참기름 넣어 휘휘 젓고, 다시 재료를 얹고, 김밥을 말고……. 세보지도 않았다. 밥솥에서 밥이 연거푸 나왔다. 그리고 모든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쌌다. 김밥 마는 기계처럼.


주문만 하면 김밥 파는 집에서 정성껏 해 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걸 내가 잘, 했다. 그렇게 김밥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세상에 멸치 김밥이 나오기 전에 나는 멸치 김밥을 말았다. 누드 김밥이 나오기 전에 뽀얀 밥으로 속 재료를 감싼 누드 김밥을 말았다. 고추 삭힌 것을 잘게 다녀 넣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시그니처’ 메뉴는 김치김밥이다. TV에서 ‘먹신’이 예찬하는 묵은지 김밥을 나는 오래전에 맛있게 말았다. 잘 익은 김치를 양념을 털어 내고 물기를 꼭 짜서 살짝 기름을 두른 팬에 물기가 사라지도록 살짝 볶아 준비한다. 나머지 재료는 그때그때 집에 있는 것으로 한다. 단무지 안 먹는 딸에게 맞춤인 김밥이다. 물론 김치의 맛이 김밥의 맛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재료다. 뒤늦게 사업적 마인드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며칠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김밥용 김을 대량 주문했다. 애들이 먹고 싶다고 할 때 여러 재료를 사러 나가지 않아도 김만 있으면 있는 재료로 둘둘 말아 주면 아이들은 맛있다며 먹는다. 하는 과정은 번거롭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상차림을 따로 하지 않아도, 방에 각각 넣어주면 밥을 먹였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간단하게 먹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간단한 식사가 된다.


김밥이 내 영혼을 살리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자식들의 배를 든든하게 했다. 소풍 때마다 아이들의 마음을 뿌듯하게도 했다. 아직도 두 아이의 입맛을 저격하는 음식은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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