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에어컨은 아직 옷을 벗지 않았다. 커버에 씌워진 채로 2020년의 여름이 지나고 있다. 특별히 사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커버를 씌워 사용을 막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여름 사용하고 잘 닦아 커버를 씌웠는데, 올여름 긴 장마에 아침저녁으로는 춥기까지 하는 날들이 많아 사용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폭염이라고 재난 문자가 날아오던 날, 책상에 앉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다. 선풍기를 바로 옆에 틀어 놓고 있는데도 얼굴은 화끈거렸고 선풍기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여름임을 실감했던 날이었다. 딸은 방에서 나오며 너무 덥지 않냐고 물었고 선풍기 틀고 있으면 그래도 버틸 만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집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의식하지 않고 있던 커버에 씌워진 에어컨.
선풍기로 버틴 여름... 이상기후 때문에?
지난여름 아파트는 한차례 정전 사태가 있었다. 변압기가 고장 났다고 했다. 밤새 틀고 자다시피 하는 선풍기가 멎었고, 우리는 아주 가끔 틀었지만 집집마다 에어컨 사용이 많아져서라는 진단이었다. 자정이 안 되는 시간에 정전이 되었고, 잠을 못 이루고 있던 가족들은 급히 찜질방으로 대피했다. 찜질방에 가니 엘리베이터나 현관에서 드문드문 마주쳤던 얼굴도 있었다. 이웃들도 우리와 같이 더위를 피해 찜질방을 택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오니 정전 사태는 마무리되어 있었다.
변압기는 교체되었고 관리사무소에서는 그날 이후로 저녁때마다 여러 번 방송을 했다. 다시 변압기 사고가 있을 수 있으니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아침부터 시작해서 때마다 주기적으로 이어졌고, 잠들기 직전까지 들리는 그 방송을 알람처럼 들으며 잠에 들었었다.
거기에 8월 중순 이후까지 늦더위로 바람도 없어서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시간도 보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자정이 넘어서도 공원으로 바람을 찾아 여러 번 나갔었다. 그런데 올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잠에 들 시간에 숨 막힐 것 같은 더위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새벽이면 두꺼운 이불을 찾았던 것 같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있고 가을이 시작된다는 처서가 지났다.
오늘도 방마다 선풍기가 운행 중이다. 생각해보니 선풍기의 바람 세기도 '강'으로 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사용하는 선풍기는 항상 '미풍' 방향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얼마 전에 들은 먼 시베리아의 이상 기후에 관한 뉴스가 생각났다. 시베리아인데도 기온이 30도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데, 선풍기의 '미풍'으로 버틴 이 여름 역시 이상 기후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8월 중순에 커버가 씌워진 에어컨, 미풍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웃음이 나왔다. 지난해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니 올해는 한 번도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없었던 것 같다. 코로나와 홍수 등의 피해로 온통 나라가 시끄러운 사이 과도한 전기 사용으로 인한 셧다운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더 큰 재앙이 작은 재앙을 삼키는 것은 아닐는지. 재앙이라는 말이 생각지도 않게 툭 튀어나왔다.
기후변화의 위험이 우리의 코앞에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더위는 주춤했지만 수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은 곳곳에 너무나 많았다. 예년 같으면 한쪽 지방에만 큰 피해를 내고 물러섰던 장마가 올해는 지역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서서히 다가오는 환경의 재앙은 평소에는 모르고 있다가 맞닥뜨리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인지도. 그러고도 이내 잊히는 우를 우리는 매번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후대를 위한 유산은 결국 환경뿐
며칠 전 tbs <뉴스공장>에 출연한 녹색성장연구소의 이유진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섬찟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기후변화 문제는 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시간의 여유는 없고, 우리에게 올해 닥친 장마는 기후 위기였다고 말했다. 지구의 평균 온도는 1도가 높아졌을 뿐인데 세계의 이상 기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며, 앞으로 7년 정도 지구가 현재의 속도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면 2040년이 되면 지구의 온도가 1.5도 올라가게 된다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이미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 10년 이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지금의 절반 이내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미래는 없다고 했다. 그때는 노력을 해 봤자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이유진 박사는 지금도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매년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탄소 배출량 세계 11위의 국가이며 '기후 악당 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고도 말했다. 온실가스의 배출량이 '0'이 되게 하는 정책, '탄소 넷 제로(Net-Zero)'. EU 국가 일부에서는 이미 5년 후 또는 10년 이내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EU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러한 노력들이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례 없는 장마 피해에 환경부에서는 이제는 우리나라도 기후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부터 시작해서 대비한다면 어느 만큼 수치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OECD에서의 경제 성장 순위는 맹렬하게 따지지만 누구도 환경에 관한 순위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위험 앞에 우리는 아직 너무 안일하고 무방비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열대야 없이 지난 올해의 여름을 단지 좋았다고 말할 수많은 없는 것 같다.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고 보낸 여름 역시, 뿌듯해하고 자랑삼아 쉽게 말할 것도 아닌 것 같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더위를 이겨보는 것과 서늘한 날씨로 인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것과는 분명 다르다. 뜨거운 더위도 땀 흘리며 넘기고 매서운 추위에 손과 발이 시리게 보냈던 것이 우리의 여름과 겨울이었다.
자녀들을 위해, 후대를 위해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은 결국 환경밖에 없는 것 같다.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해서 때마다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지는 살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UN에서 연설한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이 크게 회자된 적이 있다. 어린 학생의 절절한 연설이 방송에 크게 보도되었는 데도 나는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애가 환경에 대해 얼마나 깊이가 있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세계에서 나타나는 이상 기후로 인한 재난을 보고, 시베리아의 이상 기온을 뉴스로 듣고, 우리나라의 장마 상황을 목격하고, 마지막으로 올해의 서늘한 날씨까지 경험하고 나니 비로소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매일 듣는 방송에서 전문가의 1도, 1.5도 지구 온도의 상승에 관한 경고를 들었고, 어린 학생의 어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의 연설도 들었다. 세계의 정상들 앞에서 하는 어린 학생의 절절한 말이 이제는 내 귀에도 들어온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돈 그리고 끝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어린 학생의 질문대로,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