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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25. 2020

절망적 미래를 부르는 이름, ‘기득권의 대물림’

넷플릭스 다큐 <위기의 민주주의>


지난 23일 정경심 교수의 재판이 있었다. 표창장을 위조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에 벌금 5억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뉴스를 접하며 브라질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가 떠올랐다.


작품을 보는 내내 우리나라의 여러 모습들이 겹쳐졌다. 386세대로 자라온 나는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내입으로도 말을 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억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투쟁의 구호가 되었고, 민주주의가 정착됐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는 승리의 구호가 되었다.


다큐를 통해 접한 브라질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군부정권을 몰아내기까지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당했다. 다행히 그러한 수난에서 잠시 피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익명으로 민주 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다큐는 미완으로 끝났다. 민주주의의 표상이었던 한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한 대통령은 감옥에 갔다. 국민은 양쪽으로 갈라졌고, 양 진영으로 갈라진 국민들은 더욱 극단적으로 대립된 모습이었다. 21년간의 독재를 끝내고 민주정부를 탄생시킨 나라는 다시 과거로 빠르게 회귀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브라질은 전직 군인 출신이었던 극우주의자를 보우소나루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브라질의 정치는 다시 군부가 지배하고 있고, 소수의 사람이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손자로, 손자에게서 증손자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대물림한다. 다큐에서는, 브라질은 '가장 암담했던 과거만큼 절망적으로 보이는 미래'가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다큐는 '정치의 역사가 가족의 역사'이기 때문에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야야 한다고 말하며, 그리스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부자들이 위협을 느낄 때만 작동한다고 했죠. 그렇지 않으면 기득권의 과두정치가 등장한다고요." 내레이션을 통해 나오는 말이 마음을 흔들었고 갑자기 답답해졌다.


"우리나라는 그런 가문들이 장악한 공화국입니다. 몇몇 가문은 언론을 다른 가문은 은행을 장악하고 있죠. 모래와 시멘트, 자갈과 철을 소유한 가문도 있어요. 그리고 모두들 민주주의와 법치에 진력을 내곤 합니다."


룰라의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세르지우 모루였다. 그는 2011년 퇴임 시 87퍼센트의 지지율로 두 번째 재임을 마친 룰라를, 현재 살고 있는 복층 아파트를 2009년 취득하는 과정에서 건설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부패 의혹에 대해서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아파트가 그의 소유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1심 재판에서 9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상고법원에서는 형이 12년으로 늘어났다. 2018년 대선에서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룰라는 아직 감옥에 있다.


세르지우 모루 판사의 표적수사와 수사정보 유출, 언론의 대대적인 악의적 보도는 룰라와 호세프 민주 진영의 두 대통령에게 대다수 국민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세르지우 모루 판사는 보우소나루 정권의 법무장관이 되었다. 진실이 알려지지 않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는 힘들다.


룰라는 대통령 재임 시 언론 규제법안을 발의하지 않은 것을 가장 후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검사들은 자기들의 사건을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했고, 언론에서는 룰라 가족들의 집을 급습해 수색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누군가 요제프 K를 무고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카프카, <심판>의 첫 구절)


룰라는 호세프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카프카의 <심판>에 비유한다. 요제프 K에게 가해지는 사법제도의 굴레에서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라고는 결백에 대한 확신 밖에는 없다. "그런 소송에 걸려 있다는 것은 이미 패소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세"라고 말하는 책 속의 한 구절을 룰라가 떠올렸다면,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때문에 재판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호세프의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과 반대하는 국민, 룰라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국민과 반대하는 국민들의 극단적 대치다. 영상을 보며 검찰개혁을 둘러싼 서초동의 집회가 떠올랐고 광화문의 집회가 교차되었다.


룰라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연설을 한다.


저는 정의를 믿습니다.
제 사상을 멈추게 하려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벌써 다 퍼져서 잡아 가둘 수가 없어요.
제  꿈을 중단시키려 해 보야 소용없습니다.
제가 꿈꾸기를 그쳐도
여러분의 정신과 꿈을 통해 꿈을 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룰라에게 심장마비가 오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생각하는 것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제 심장은 여러분의 심장을 통해 뛸 것이며
수백만의 심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은
하나, 둘, 백개의 장미를 꺾을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은 절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우리의 검찰과 사법은 브라질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여러 가지 사건들은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기억에서 잊히고 있다.


"정중함의 가면이 벗겨지고 절대 잊히지 않는 우리 자신의 불쾌한 모습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죠?
폐허를 헤집고 걸어 나가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어디서 얻을까요?"


여전히 정의를 믿어야 할까. 민주주의는 언제까지 정중함을 지킬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불쾌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에, 우리는 폐허를 극복하고 새롭게 시작할 힘을 낼 수는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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