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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07. 2021

간호사에 기대 엄마를 찾으며 우는 모습, 안도하게 된다

[영화 리뷰]<더 파더(The Father)>, 2020

코로나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에게 요양병원에 있는 가족을 면회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다고 했다. 코로나 방역 조치로 긴 시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해후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병원에 남겨졌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방문한 가족들도 모두 만남의 감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말로 남겨진 사람을 달래는 모습은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요양병원에 가족을 보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격리된 환자들의 집에 대한 집착을. 삶을 일구어 온 집에서, 가족의 곁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명이 연장되고 사회가 변화되면서 나이가 들어도 움직일 수 있으면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양 병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병든 어르신을 집에서 온전히 돌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영화 <더 파더>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모두 보여준다. 돌봄의 대상인 환자와 돌보는 가족. 돌보는 가족의 애환을 강조하거나 사회적 돌봄의 문제를 얘기하지는 않는다. 조용하고 깔끔하고 여유로운 듯한 요양병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오로지 알츠하이머 환자만을 이야기한다. 누구도 그 경험을 말했을 리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스크린에 생생하게 전개된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보는 것, 느끼는 감정의 정체에 대해 혼란을 겪는 모습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알츠하이머 환자인 안소니의 시각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에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시간의 착오를 따라가기 어렵다. 미세한 장면의 변화, 가구나 색, 배치된 물건들의 차이를 포착하기도 어렵다. 


영화의 중반을 지나며, 가깝거나 먼 과거, 그리고 현재를 넘나드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을 당사자의 시각에서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이전의 모든 시점과 인물들의 뒤섞임이 비로소 이해된다. 치매 환자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연출은 이제껏 알츠하이머를 그린 영화가 주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나 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희귀성 알츠하이머를 다룬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도 큰 주제는 가족이다.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자신의 유전 질환이 가족에게 옮겨 가는 것에 대한 걱정과, 알츠하이머 환자로서의 남은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당당히 살아내는 모습이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 연기나 병증이 진행되는 속도 그리고 그에 맞춰진 주변 상황의 설정은 적절하게 표현된 것 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혼란 없이 감동을 느끼며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앨리스는 지나온 삶의 유의미함을 이야기하며 찬찬히 가족을 살핀다. 그녀의 모습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증에도 불구하고 환자 스스로 가족들의 마음을 살피고 삶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앨리스의 병에 대한 담백한 태도 또한 가족이나 관객에게 여유를 갖게 만든다. 


<더 파더>는 관객을 고려하는 적절한 진행과는 거리가 있다.  환자인 안소니 자신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거대한 폭풍 한가운데에 방치된 듯한 느낌이다. 안소니의 딸 앤(올리비아 콜맨)의 노고에 안타까워할 틈도, 잠시 마음을 놓을 여유도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환자의 혼란과 공포에 함께 휩싸이게 된다. 


플로리안 젤러(Florian Zeller) 감독은 가장 흥미로운 극작가로 '타임스 오브 런던'이 선정한 인물이다. 영화 <더 파더>는 그가 10년 전에 만든 프랑스 연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미 연극으로도 다양한 수상 이력을 자랑할 만큼 극본은 빈틈없어 보이고, 주연과 조연들의 연기는 뛰어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순간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무너지는 환자의 내면을 그린 연기는 너무 실제 같아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시계에 대한 집착, 타인에 대한 경계, 떠남과 남겨짐, 자신의 지적 능력이 무시되고 조롱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대한 본능적 반응 등, 실제 환자가 느낄 법한 마음의 상태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두 가지 걱정을 했다. 미래에 혹시나 나에게도, 혹은 가족에게 그러한 일이 닥친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두 상황을 동시에 생각하며 영화를 보았다. 병은 상상이 아니고, 원한다고 해서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적 공포를 자연스럽게 대입해 보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안소니는 간호사에 기대어 엄마를 찾으며 운다. 비로소 안소니의 기억의 혼란이 공포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일까 오히려 안도하게 된다. 더 먼 과거로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것 같은 병의 진행이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지점이었다. 기억을 지우고 나니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치매센터가 지난 4월 발표한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19’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환자 수는 75만 488명으로 추정된다. 2020년-2024년 사이에는 80만 명에서 90만 명 사이로 추정하기도 한다. 장기 요양 환자 중에서도 치매 환자의 비율은 37.5퍼센트로 단연 높다고 한다(2019 노인장기요양보험통계연보). 


요양병원 간호사에게 기대어 안소니가 우는 모습과 TV에서 가족과 만나는 요양병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거운 영화를 보고 나니 해야 할 일의 압박이나 가족관계 또는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향과 목표에 대한 재설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안소니는 앤에게 말한다.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라고. 인간 수명은 늘어나고 있고 치매 환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환자의 수는 무서울 정도로 증가하는데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안심해야 되는 걸까. 그만큼 사회적 장치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이참에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에 대한 정책이나 지원도 촘촘히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건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지만, 삶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용히 기도라도 올려야 할까.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 수 있기를, 자연과 함께 나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최근 방송에서 미미시스터즈의 <우리, 자연사하자>라는 노래를 듣고 크게 공감한 기억이 있다.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가슴 뛰는 일이 꽤 많아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나 같은 이상한 애도 만나지 
5분 뒤에 누굴 만날지 
5년 뒤에 뭐가 일어날지 
걱정하지 마 기대하지 마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야
힘들 땐 '힘들다' 
무서울 땐 '무서워'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좋은 일이 생겼다고 마냥  
다 가졌다 생각하지 마  
나쁜 일이 생겼다고 마냥  
이불속에서 우울해하지 마 
우리 자연사 하자 
우리 자연사 하자 
혼자 먼저 가지 마 
우리 자연사 하자


노래가 유쾌해서 기억나고 후렴구가 온통 '우리 자연사하자'로 끝나서 한참을 웃었었다. '자연사', 병에 의해 지배당하다 죽는 것이 아닌, 사는 동안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큰 바람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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