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상징하는 세 가지
오늘도 체크무늬 천 가방을 들고 나선다. 책을 사면 주는 사은품으로 온 에코백이다. 너무 얇아 두 개를 겹으로 싸서 메고 다닌다. 한결 튼튼하다. 무거운 책을 여러 권 넣어도 끄떡없다. 가방에 책 두 권, 딸이 사준 비싼 다이어리(다이어리가 그렇게 비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휴대폰, 카드지갑, 필통 겸 각종 문구류와 이어폰 등 잡동사니 넣는 클러치. 안의 내용물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어깨에 걸치면 가죽 가방처럼 미끄러져 내려올 염려 없이 나의 축 처진 어깨에도 잘 붙어 있는 가방이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가방은 하나인데 손잡이는 네 개. 가방 두 개가 겹쳐진 것을 알기 전까지는 손잡이를 튼튼하고 색다르게 만든 것으로 생각해서 저마다 만져보고 확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나는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었다. 보석도 좋아하지 않고 비싼 명품 가방도 좋아하지 않았다. 옷은 좋아했다. 옷도 명품이라 불리는 것보다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그때그때 예뻐 보이고 편한 옷들로 주문해서 입었다. 가짓수는 많았지만 값어치는 없는 옷들을 훨씬 편하게 생각했고 즐겨 입었다. 내가 가진 비싼 옷들은 주로 30대 전후로 장만한 것들이 전부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도 그 옷들을 버리지 않았다. 몸이 불어 사이즈가 맞지 않을 때에도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로 버티며 언젠가 몸에 맞겠지 생각하고 지켜냈다. 지금은 그 옷들이 맞게 몸이 조절되었다. 내가 가진 가장 비싼 옷들을 드디어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옷들이기도 하고 약간의 차이는 개성으로 보는 시대이기도 해서 입을 만하다. 값싼 옷들에도 예전의 그 옷들에도 체크무늬 에코백은 썩 잘 어울린다.
겨울 시즌의 나의 외출복은 80퍼센트는 항상 같다. 학생들의 교복이라 불리는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학생들의 옷은 유행을 타기 때문에 요즘은 학생들 사이에서 짧은 패딩이 유행한다고 들었고, 학생들이 입던 그 긴 패딩은 점차 부모님들의 몫이 된다고 하지만, 내게는 시작부터 몇 해째 겨울철 필수 템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추위는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물론 더위도 견디기 힘들지만. 지구 온난화로 겨울 추위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고, 올겨울 추위는 엄청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던 그해 겨울, 나는 모스크바 여행을 계획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고 가족들이 그곳을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선택한 여행지였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을 다녀오는 12일간의 겨울 여행. 시베리아의 추위를 실감했던 여행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것들을 사들였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지금은 교복이 된 검은색 롱패딩이었다. 거위털이 잔뜩 들어간, 입기만 해도 몽실몽실 굴러다닐 것 같은 옷.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곳으로의 여행에서도 견딜 수 있다고 자신했다. 외투가 그러하니 다른 옷들은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안에 껴입을 내복과 기모가 잔뜩 들어간 후드 티. 멋은 고려하지 않고 한파를 피하는 용도로만 옷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종아리를 덮는 롱부츠. 모든 사진이 검은 롱 패딩에 쌓여 얼굴만 빼꼼히 간신히 보이게 되는 옷이었지만 덕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상트의 황량한 토끼섬의 강바람도 막은 옷이다. 그보다 더한 추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 겨울 이후, 나의 겨울나기는 한결 견딜 만 해졌다. 이 교복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usb, 이동식 저장장치인 이 작은 부품을 나는 좋아한다. 늘 이것을 가지고 다닌다. 올해만 몇 번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으나 그때마다 내 품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여럿 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지갑만큼 두툼한 외장 하드를 준비해서 들고 다녔다. 학교에서 쓰는 것이기도 했고 아이들과의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영상 자료도 들어있어 용량이 크지 않으면 작은 것 여러 개를 들고 다녀야 했고, 각각 어디에 어떤 것들이 들었는지 일일이 찾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지금 갖고 다니는 작은 이동저장장치는 글쓰기용이다. 머릿속에 들어온 글들을 한글 문서로 작업한 후에 글쓰기 폴더의 각 방에 적당히 넣어 놓는다. 그렇게 모인 글들을 수시로 들어가 수정하고 다시 입력하고를 반복한 후 어느 정도 분량이 완성되면 작가의 서랍에 입고한다. usb는 나의 글 저장창고인 셈이다.
글쓰기를 시작하고부터 usb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지갑을 놓고 와도, 휴대폰이 없어도 이것만은 꼭 들고 다녀야 했고 혹시라도 파손될까 염려하며 두툼한 헝겊 지갑에 쌓여 보호되어야 했다. 이 작은 파일 저장고에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들어있다.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도 하나씩 들어간다. 머리에서 꺼낸 기억들은 엉클어진 실타래에서 비죽비죽 빠져나와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라지지 않도록 잡았고 다시 정리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두었다. 어느 구석에 있었는지 모를 기억들이 살아온 시간의 두께만큼 깊숙이 숨어 있다가 발견해 꺼내면 나에게로 왔다. 내가 찾은 나를, 그 기억들을 나는 이곳에 정리하고 쌓는다. 함부로 내놓지도, 방치하지도 말아야 할 나를 잘 다독이고 매만지고 있다. 꾸준히 나를 찾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이 작은 이동식 저장장치다.
이 셋만 있으면 난 어디든 갈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가방 안에 든 카드 지갑으로 차 한 잔을 마시며 다섯여섯 시간을 카페에서 즐길 수도 있고, 서울 시내 인사동이나 서촌, 북촌을 헤매고 다닐 수도 있다. 요즘 같은 ‘삼한사미’(삼일은 춥고 사일은 미세먼지)도 걱정할 필요 없다. 추위는 물론이고 목까지, 아니 입까지 올라오도록 교복을 여미고 모자까지 뒤집어쓰면 완벽하게 미세먼지도 방어할 수 있다. 요즘은 도서관뿐만 아니라 관공서에서 방문객을 위한 피시 한 대쯤은 운용하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 잠깐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서 저장할 수도 있다. 안에 든 나의 글을 한 장 복사해서 그때그때 메모할 수도, 첨삭할 수도 있다. 뭐든 다 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나를 보여주는 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