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을 읽고
김초엽 작가의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재미있게 읽었다. 장르는 SF지만,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과학적인 철학 소설"로도 회자되었지만 내게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답이랄까. 김초엽 작가의 에세이 <책과 우연들>에는, SF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우주, 외계인, 과학용어와 금속성 기술이 등장하지만 '결국 인간 이야기'라고 말한다. 웜홀과 상대성 이론 등으로 우리나라의 관객을 매혹시킨 영화 <인터스텔라>는 아빠와 딸의 이야기이며, 언어에 대한 가설, 페르마의 원리를 다루는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역시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고.
김초엽 작가의 에세이 <책과 우연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 그래서 반가웠다. 우연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과 내게 도달한 책이 일상에 어떤 충돌을 더하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도 컸다. "여정을 되짚어가며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탐험의 기록"이라는 작가의 말은 또 어떻게 펼쳐질까 궁금했다.
글이라는 결과를 내가 처음 내어 놓았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글을 마무리했다는 기쁨에 이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을까 무척 두렵고 긴장되었던 기억이다. 과연 읽힐 만한 글이었을까 복잡하고 어지러운 심정이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긴 인생의 이야기를 짧게 압축해서 두서없이 펼치는 내 글은 개인마다 책 몇 권은 된다는 인생의 서사를 곧 바닥나게 만들었고 글쓰기를 주저하게 했다.
더 많은 책이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우린 충분할지도.
이때부터 책이 필요했다. 다른 작가의 글을 막연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써야 할 글의 장르가 없었으므로 손에 닿는 대로 읽었다. 소설, 에세이, 자연과학, 시집, 그림책과 느낌이 좋은 책, 표지가 좋은 책, 제목이 끌리는 책, 좋아하는 작가의 책 등. 우연한 만남에도 읽으면 쓸 거리가 잠깐 반짝했다. 한 편의 글 정도는 읽은 것을 밑천 삼아 완성할 수 있었다. 서술어를 가다듬고 언어 표현을 바꾸고 문장 구조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해서 근근이 나에게 읽기는 쓰기로 이어졌다. <책과 우연들>에서는 읽기가 쓰기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을 준다. 책은 '새내기 작가의 좌충우돌 생존기와 혼란의 독서 여정'을 보여준다. 개별적인 독서의 경험이 어떻게 창작으로 이어지는지 과정에 주목해서 들려준다. 책은 기이하면서도 눈이 번쩍 뜨이는 세상으로 안내한다.
작가 초기, 단편과 장편의 작법을 몰랐을 때, 단편을 길게 늘어놓으면 장편이 되고 장편이 될 법한 내용을 압축하면 단편이 되는 줄 알았던 SF 단편으로 경력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첫 장면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 장면과 장면 사이를 전환하는 방법이 궁금할 때, 회상 장면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작가의 고민과 선택, 돌파구,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던 상황과 바탕이 되었던 책을 소개한다.
"소설도 배워서 쓸 수 있답니다!"
그때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타고난 작가들 말고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밤낮으로 들려주며 친구들을 휘어잡았던 그런 작가들 말고, 스토리텔링의 재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나도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몇 권의 작법서를 읽으면서 나는 진짜 소설 쓰기의 세계로 진입했다.
예를 들면, 테이먼 나이트의 <단편 쓰기의 모든 것 Creating Short Fiction>에는 '하나의 아이디어로는 부족하다!'를 강조한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의 오류를 지적하며 아이디어 하나에 두 번째, 세 번째 아이디어를 덧붙일 것을 권한다. 거기에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인물, 장소, 상황, 감정을 끌어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움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이어진다. 단편 <스펙트럼>에서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뒤집는 것, 수명관계를 역전시킨다는 처음의 아이디어에 책의 조언을 바탕으로 '반려동물이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님으로써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한다는 것과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에 아득한 소통의 지연이 유발된다는 발상을 덧붙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법서만 유용한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 사전>, <디테일 사전>, <캐릭터 작업 사전>, <인간의 130가지 감정 표현법>, <캐릭터 만들기의 모든 것> 등의 각종 사전들을 통해 장소 묘사의 디테일과 감정 서술의 세부를 보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 사전>에서 '인물이 강제 추방을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과 이 경우 가질 수 있는 두려움, 형성될 수 있는 성격 특성'에 도움을 받았으며, <캐릭터 만들기의 모든 것 1:99가지 긍정적 성격>에서는 '성격 형성의 배경과 연관된 행동들, 영화와 문학작품 속 사례'에 대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책과 우연들>은 에세이지만 다양한 책의 서평집이며, 재능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료가 작가를 만든다는 증명의 과정이기도 하다. '얼렁뚱땅 논픽션'을 쓴 경험은 글 쓰는 작가가 아닌 연구자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이보그가 되다>의 집필 과정은 흩어진 자료를 찾아내는 과정과 방향을 찾으면 길을 보인다는 열정과 끈기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마다 저마다의 창작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작가의 말은 큰 힘이 될 것 같다. 특히 이제 막 시작했지만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초보 작가들에게는 작가의 길이, 작가가 본 작법서와 자료가 유용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책을 읽다 보니 나 자신에게 잘 맞는 작법의 도구를 찾을 때까지, 그리하여 스스로의 창작의 길을 만들기 전까지 작가의 길을 따라가 볼까 싶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순간이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이름은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일단 다양한 작법서로 책장을 채우는 것부터가 시작이겠지?
소설은 아는 걸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백지 위에 세계를 단숨에 휘갈겨 그려낼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에게 없다면 적어도 다양한 재료를 가져와 그것을 섞고 다져서 토대로 쌓아 올려보자고 생각했다.
'각자의 앎이 동떨어지지 않다는 사실'과 '누구도 오직 홀로만 탁월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글쓰기를 접어야 하나 하는 마음을 거두게 한다. 타고난 작가는 없으며, 아는 걸 쓰는 게 아닌 쓰면서 알아가는 글쓰기의 삶을 당당하게 걷자. 거기에 작가가 막연히 기댔던 작법서의 존재가 갖는 '진정제'의 효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