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향기에 취해 화분을 들여놓은 지가 벌써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처음부터 큰 화분을 욕심내지는 않았다. 작지만 잎이 풍성한 것들을 주로 데려왔는데, 그때 자잘하던 것들이 키도 몸집도 키워 이제는 베란다가 잎들로 꽉 차서 물이라도 주려고 하면 몸을 최대한 웅크려야 할 정도가 됐다. 사람도 쑥쑥 잘 크지만 식물이 크는 것은 크 변화가 눈에 보여 언제나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특히 몬스테라는 내 키를 넘어서는 중이다. 새로 나오는 잎은 이전 것보다 조금씩 더 커지는 것 같고. 잎의 갈라짐도 선명하고 멋스럽다. 그렇게 줄기차게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그렇게 또렷하게 자기 형태를 드러내는 것도 신기하다. 꾸준히 새 잎을 쑥쑥 내어 놓던 군자란은 한동안 새 잎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몇 달 만에 가운데에서 새 입이 삐죽 내밀었다. 성장이 멈추면 죽는 것 같아 화분을 정리해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는데, 마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당당히 증명하는 것 같다.
화분 하나 없던 우리 집에서 식물을 키우게 된 것은 남편의 발병 때문이었다. 수술과 항암으로 본인도 지켜보는 사람도 할 수 없는 말들이 마음에 쌓여가던 때였다. 그런 마음을 둘 곳을 찾아 식물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이제는 식물도 남편도 건강한 리듬을 되찾은 것 같다. 더불어 저절로 견디고 저절로 자라는 식물의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얻기도 한다.
처음 데려온 그대로 마냥 키울 수는 없다. 적당한 때에 분갈이는 필수다. 분갈이를 하며 가지치기도 필요하다. 하나 하는 것도 큰 공사처럼 때론 버겁고 조심스러워서 우리 집 화분들은 나름의 대기 번호를 갖고 있다. 커다란 줄기에서 뻗어 나온 새 가지들은 잘라서 투명 플라스틱 컵에서 뿌리를 내리게 한다. 뿌리가 나오면 적당한 화분을 골라 흙으로 옮겨 심는다. 그렇게 해서 늘린 화분도 제법 많다.
한참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근처에 있는 꽃시장에 매주 들르곤 했다. 식물이 자라는 환경과 다양한 식물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학습 장소였다. 사실 뭔가를 보고 배운다기보다는 온통 식물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왜 그런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눅눅하면서도 묘한 향과 에너지의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물의 호흡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동대문 꽃시장도 우리가 자주 가던 곳이었다. 거리 한쪽에 나무 도매상들이 줄지어 도열한 모습은 그 어떤 시장보다 경이로운 장소였다. 그곳에서 데려온 화분도 많다. 화분을 사서 집에 들여오면 새 식구를 맞이한 기분에 며칠을 지켜보며 관찰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 시간이 식물에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시들해 보이기도, 잎을 많이 떨구기도 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그랬다. 낯섦은 두려움이고 두려움이 익숙함으로, 다시 편안함으로 바뀌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사람이든 식물이든 새로운 환경은 설렘도 있겠지만 대개는 조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식물을 키우면 벌레와는 자연스럽게 친밀해져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아직은 고약한 벌레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뿌리파리는 초대하지 않은 첫 손님이었다. 식물이 있으니 날벌레가 늘었거니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수가 갑자기 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각종 퇴치제를 뿌려가며 없애려고 노력했는데, 결국은 분갈이도 하고 동대문 근처 농약상에서 사 온 약을 뿌리고서야 잡을 수 있었다. 농약을 집에 갖춰 놓고 다뤄야 한다는 것에는 은근히 불편한 마음도 있었지만, 있어야 할 것은 있어야 상황이 닥쳤을 때 적절히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경험이었다.
식물도 농약도 사고 나면 늦은 점심때가 되곤 했는데, 언제나 가던 식당을 찾았다. 삼계탕 전문 식당을 지나고 육회 전문 식당이 즐비한 곳을 헤치고 지나가면 생선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좁은 골목 양쪽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메뉴. 두 가지 생선을 양껏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게 내놓는 식당은 동대문까지 가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에 무엇이든 잘 키우는 동료가 있었다. 화분이든 동물이든 아이들이든, 그녀에게는 뭐든 쉬운 것 같았다. 아무튼 방학이 되어 그동안 학교에서 돌보던 화분을 집으로 가져가야 했는데 고맙게도 그중 두 개를 내게 건네주었다. 당시는 화분을 사들이는 것에 한참 재미를 붙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들여온 꽃기린은 생장력이 좋은 식물이었지만 집에 데려오고 난 후 한동한은 꽃을 볼 수 없었다. 성장도 멈췄던 것 같다.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지금은 꽃대가 쉴 새 없이 올라와 빨간 꽃을 피우고 있다. 초록색이 가득한 곳에 빨간 포인트는 흔하지 않아 귀한 기분이 든다. 화려한 장미가 꽃의 여왕의 타이틀을 갖는 것이 이해될 만큼 작은 빨강이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 같다.
한때 버려졌던 식물도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 이름도 예쁜 해피트리는 화분에 담배꽁초가 가득한 채 버려져 있었다. 말라서 버석거리는 잎 두 장 간신히 매달린 채 뿌리도 말라 이미 죽은 것 같은 나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온 남편의 수고를 생각해서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일주일을 보냈고 그 후에 화분에 옮겨 꾸준히 물을 주었다. 두 달은 족히 넘는 시간이 흘렀을 때 죽은 것 같은 가지에서 작은 새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지가 두껍고 크기 때문에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도 있었지만 나무는 생각보다 훨씬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이 당시의 내 소감이었다. 그렇게 회생한 화분은 지금도 베란다 한쪽에서 든든히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자연의 힘은 참으로 위대한 것 같다. 사람은 나약하고 쉽게 포기하거나 무너지지만, 식물은 그저 오래 견디는 것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이 확실히 인간보다 한수 위다. 처음엔 초록이 주는 생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식물과 함께 나도 오늘을 가만히 견디는 지혜를 얻는 듯싶다.
나이가 드니 뭐든 시들하다. 에너지를 쏟을 일도 없지만 에너지를 쏟을 대상도 없다. 그렇다고 새로이 대상을 만드는 것도 어쩐지 귀찮다.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심란해지고 쉼은 휴식이 아니라 침잠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때맞춰 주는 물만을 잘 먹고 잘 자라는, 마치 꼭꼭 씹어먹어 자양분으로 모두 흡수하는 듯한 거침없는 생명력의 식물을 보다 보면 살아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한다. 살자, 움직이자, 피워내자, 견디자. 그게 목적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오늘도 식물이 내게 주는 위로와 격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