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던 옷들을 정리한다. 정리한 옷들을 서랍에 있던 겨울 옷들과 자리를 바꾼다. 계절에 따라 옷의 부피 차이, 무게 차이가 확연하다. 여름옷들을 정리하는 겨울철이 되면 서랍에 빈 공간이 많이 생긴다. 대신 늘 입는 옷을 걸어놓는 행거는 털외투처럼 부푼다. 지나고 보면 늘 입는 옷들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언제든 입을 수 있도록 정리해서 걸어 놓는다. 눈에 띄는 대로 정리한 것인데 참 많다.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지만 옷에 대한 욕심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럽다.
유전자의 힘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들을 낳고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들이 증조할아버지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할아버지,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으니 사사로이 감정이 생기고 말 것도 없었다. 그저 인심 좋고 노래를 좋아하고 자식들과 음악과 영화를 함께 즐길 만큼 격의 없고 문화적 취향이나 소통이 열린 분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 아들의 아버지, 내게 시할아버님은 시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대해 주신 분이셨다.
말에는 가시가 있다. 편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했다가 순간순간 무언가 찌르는 듯 움찔하는 때가 있었다. 사실 결혼 전까지는 막내로 커서 하고 싶은 말에 크게 제약을 둔 적이 없었다. 소박하다 못해 부족한 가정이었지만 만나면 누구나 웃어주고 반겨주고 기꺼워했다. 당연히 가족 누구에게도 뾰족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다 결혼이란 걸 해서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말의 느낌을 비로소 경험했던 것 같다. 가시 돋친 말의 의미를 실감하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과의 대화는 그래서 늘 불편했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서도 그들은 가시를 세웠다. 할아버지를 얼마나 미워했으면 그렇게 쏙 빼다 박았을까? 그 말을 백 번쯤 들었을 때, 우선은 시할아버님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할아버님은 아들이 배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첫째가 딸이 것을 아쉬워하셨다는 말을 시고모를 비롯한 시댁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는데, 정작 내게는 그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할아버지를 미워할 이유가 없던 나는 사람들의 말을 적당히 걸러 들었다. 손주를 당장 보지 못하는 서운함에 한두 번 하셨겠거니...
시할아버님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들은 옷 욕심에 관한 한 나를 닮은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기까지의 나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한다. 돈을 버는 족족 옷을 사들인다. 사실 아들의 경제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부모 된 기준에서는 아들이 너무 많이 옷을 산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매일 택배가 온다. 처음엔 아들도 엄마가 택배를 확인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당당하게 행동한다.
문제는 사는 옷들이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청바지나 검정바지, 재색이나 검정 후드티에 검정 점퍼. 디자인도 색도 내게는 다를 바 없는 옷들이 점점 쌓여 간다. 잔소리도 처음 한두 번이 먹히지 많이 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라고 오히려 부정적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때도 있다. 듣기 싫다. 심하다, 짜증 난다 등등... 물론 아직까지는 그런 내색을 한 적은 없다.
똑같은 후드티가 10개쯤. 여름에 입는 반팔 티도 같은 디자인 같은 색이 분리수거로 한바탕 정리를 했는 데도 스무 개가 넘게 남아 있다. 연예인들의 옷방을 보면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아들의 티는 정리할 때마다 끝이 없다. 뻔한 공간에 크기와 부피가 큰 옷들을 정리하고 세탁하는 것은 내 일이다. 이놈의 캥거루족. 세탁과 정리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사실 귀찮기는 하다).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적절히 어울리게 매치해서 입었으면 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슬프게도 타고난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이나 먹는 음식, 환경 등은 후성유전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우리 몸에 유전자 발현 시스템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특정 유전자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등 작동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발현과 변형은 새롭게 조절하며 다시 대물림될 수 있다는 것이다.(장연규, <유전자 스위치>에서 참고)
유튜브 채널에서 한국사람들의 옷차림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한국인들의 이상한 옷차림이 주제였는데, 뜨거운 여름에 긴팔을 입고 다니거나, 겨울에 반바지에 맨발, 슬리퍼 차림으로 검정 점퍼를 걸치고 다니는 것을 신기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나도 자주 본 적이 있지만 그저 저런 차림으로 다닌다,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쳤던 그것이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한국사람들만이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유전학에서도 성격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주변 환경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아들이 옷을 좋아하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엄마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특이한 편집증적 쇼핑은 요즘 세대의 성향이나 흐름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출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지 나 같은 범인은 불가능한 경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아들 방도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다. 정리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필요하다. 온 방을 뒤집을 생각으로 시작해야 쉽게 지치지 않고 끝을 볼 수 있다.
돌아보면 남편도 옷을 좋아했던 것 같다. 누이가 월급날 새 옷을 사 주면 그 옷을 입고 나를 만나곤 했으니. 새것이라고 아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입고 새것이 주는 기분을 즐겼던 것은 아들도 비슷한 것 같다. 매일 오는 택배에 늘 새것을 입으니 한두 번 빨고 점점 안 쪽으로 들어간 옷은 아예 빛을 보지 못한다.
남편과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이 비움이나 단출함의 묘를 깨닫기는 당장은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우리처럼 나이가 먹으면 그때는 조금은 가볍게 살 결심을 어쩌면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러니 지금은 그냥 아들의 기행을 보아 넘길 수밖에 없다. 내 어머니가 지켜보고 묵묵히 정리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