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준비가 귀찮은 날이다. 매우 늦은 점심을 먹었으니 그냥 한 끼 적당히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건만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늘 문제다. 이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남편은 단골 식당에 주문을 넣고 음식을 찾으러 가겠다고 외투를 걸친다. 게으른 마음은 어느샌가 저만치 달아났다. 기꺼운 마음으로 남편과 동행한다.
역시 맛집은 다르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더 기다리니 주문한 음식을 받을 수 있다. 가서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낙엽이 소복이 쌓인 길의 정취가 마음을 자꾸 붙잡는다. 마음은 느긋하지만 몸은 부지런하게 집에 들어와 딸을 부르고 포장된 음식을 꺼내는데, 포장용기 위에 낙엽 한 장이 얌전히 앉아 있다. 가을향기를 탐하는 아쉬운 마음을 들켰던 걸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마음은 빠르게 좀 전의 그 길로 빠져드는데 딸은 엄마가 주워온 것이냐며 묻는다. 산에 가면 예쁜 색의 낙엽을 한두 장씩 들고 와서 선물이라며 건넸던 것이 엄마의 낭만이라고 생각한 딸의 자연스러운 물음이다.
아파트 경비아저씨의 하루 일과가 낙엽에서 시작해서 낙엽으로 끝나는 시즌이다. 지난 밤늦은 시간에도 낙엽을 쓰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른 새벽부터 다시 빗자루질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마른 낙엽이라서 쓸면 쓸리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비라도 내리면 바닥에 딱 달라붙은 낙엽 때문에 빗자루질을 여러 번 해야 하니 그야말로 마음을 초긍정으로 먹어야 하는 때다.
일부러 낙엽 쌓인 정취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 어느 곳인가는 낙엽을 길에 깔아놓는다는 말도 들었는데, 생활과 밀접한 공간의 낙엽은 그렇게 방치하기는 무리가 있나 보다. 출근과 퇴근, 등교와 하교, 집과 아이와 주부의 일상은 마음을 마음대로 흔드는 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 없으니 잠깐 빠지고 얼른 벗어날 수 있도록, 치고 빠지기의 묘가 필요한 특별한 공간이랄 수밖에는.
누군가에게는 일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사색이 되고, 일이 되는 그 누군가에게도 어쩌면 잠깐의 낭만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떨어지는 잎이 과하다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할퀴지 않았으면 싶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펜드로잉 수업을 신청했는데 요행히 순번이 밀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기 있는 강좌, 특히 드로잉이나 스케치 수업은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아 신청 당일 한 시간만 지나도 금세 인원이 차서 밀리고 만다. 이번엔 알람도 설정하고 달력에 메모도 해서 놓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당일 일찍 알람이 울린 탓에 미리 준비하고 홈페이지 열어놓고 시간을 기다렸다가 신청했는데 다행히 통과가 됐다.
열흘 정도 지나니 재료비 납부 메시지가 왔고 다시 한 주가 지나니 수업 안내가 왔다. 첫 수업일에 일찍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 도착하니 저마다 설렘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어색하고 수줍은 눈인사를 건넨다. 재료 설명 끝나고 선긋기 수업 짧게 마치고 대상을 도형화하는 것에 대한 내용 설명하고... 첫 그림의 견본을 받았다. 풀과 나무가 많은 시골 농가가 있는 전원 풍경.
풀이 많아서, 나무가 많아서 좋았다. 그 속에 자그마한 집이 너무 고요해서 마음에 쏙 들어온 그림이었는데, 어렵지만 열심히 그렸다. 나의 첫 드로잉 수업은 도전적이었고, 불안한 손끝과 뿌듯함이 교차하며 두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싫다면,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생각하라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행복하다 싶으면 그것이 바로 재능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꾸준함과 들인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바로 실력이 된다는 말은 도전정신을 북돋기에 충분했다. 수업 두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고 그 시간이 좋았으니 재능이 꽝은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드로잉 수업의 과정은 모두 끝났지만 지금도 수업 시간과 같은 시간을 할애해 스케치를 한다. 오늘은 꽃과 잎과 차와 책이 있는 그림이다. 꽃, 잎, 책, 차,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가을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직은 검정 펜으로만 그림을 그리고 명암을 표현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가을의 색감을 입히고 싶다는 바람이 일렁인다.
얼마 전 지인이 늙은 호박 한 덩이와 산수유 열매를 건넸다. 산수유 열매는 깨끗이 씻어 채반에 걸쳐 베란다에 펼쳐놓았다. 새빨간 산수유 열매가 창밖에 비치는 가을의 풍경과도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삼사일 말리면 열매가 쪼글쪼글해지고 그때 씨를 분리하고 바짝 말려 술로 담가도 되고 청으로 담가 차로 마시기도 한다니 더 정성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여름 장미의 빨강이 저 홀로 우쭐한 느낌이었다면 가을의 빨강은 폭 안아주는 느낌이다. 황금빛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고 했던 디킨스와 마음이 통했나 보다.
개인적으로는 늙은 호박이 반가웠다. 호박죽을 끓이면 우리 가족 넉넉히 두세 번에 나눠 먹을 수 있는 양이될 것이지만 아직은 가져온 그대로 부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가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노랗다기엔 갈색이 많이 섞였고 선명하지 않은 것이 빛바랜 낙엽과 닮아 있어 마치 집 안에 한가득 가을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우연이든 인연이든, 밖의 가을을 안으로 들이고 싶었던 바람은 현실이 되고 지금은 가을과 나란히 눈을 맞추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