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에 하루를 시작한다. 5시 40분에 도착하는 첫 차의 승객은 언제나 만원이다. 출근시간처럼 떠밀리 는 않아도 될 정도의 속도로 승차하고 가만히 손잡이에 몸을 기대는 사람들. 피곤이 가시지 않은 채로 시작된 하루지만 다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다. 마냥 여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많아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새벽은 신비롭다.
지하철을 타러 오는 길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먹자골목을 지난다. 저녁이 되면 넓은 길의 절반 이상은 식당에서 내어 놓은 야외 테이블로 차려지고 길은 좁은 골목길로 바뀐다. 사람들은 벌게진 얼굴로 습관처럼 술잔을 부딪힌다. 높아진 목소리, 여기저기서 뿜어내는 담배 연기, 술 취한 거리의 풍경은 흥청거리는데 새벽이 되면 어제의 기억에 시치미를 뚝 뗀다. 여기저기 흩어진 담배꽁초와 땅바닥에 들러붙은 전단지, 만취의 흔적만이 남은 거리는 지난밤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일찍 집을 나서서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딘가부터 멀끔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맞은편 거리는 지난밤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있다. 이어 구석구석 쉬지 않고 빗자루로 쓸고 있는 환경 미화원의 모습이 보인다. 몸을 움츠리게 했던 찬 바람이 저만치 달아나는 순간이다.
최근 한 달, 남편의 이른 하루가 시작됐다. 5시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서면 6시 23분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탄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집을 나서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런저런 안부를 살피는 내게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지하철 풍경을 전한다. 정돈된 하루를 시작하는 오피스 근무자들보다 이른 시각,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부지런한 아침 이야기다.
덩달아 같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첫 찻길이 나오는 횡단보도까지 남편을 배웅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도 시작된다. 컴컴한 사방,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의 어스름은 나태한 마음을 내쫓는 듯하다. 어떤 이유로든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도록 마음을 다잡게 한다.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 유난히 바삭거리는 길을 걷는다. 발아래 부서지는 나뭇잎 소리가 오래도록 잔상에 남아 마음을 흔들었던 때가 있었다. 소복이 쌓인 나뭇잎이 처연하게 부서지는 소리에 그날의 하루와 불안한 현실과 막연한 미래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며 동요했던 날들이었다.
그때와 다르게 오늘의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는 훨씬 묵직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이런 느낌의 차이는 아마도 예순의 나이 때문은 아닐까 싶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삶의 무게가 허무하게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에 가볍게 들뜨지 않도록 허락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길은 고요 속에 묻혀 있다. 네거리 중심에 방범 네온사인이 색을 바꾸며 빛을 내지만 그마저도 고요한 풍경의 하나일 뿐이다. 사람들은 첫추위에 단단히 옷을 여미는데, 나무는 미처 색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움츠렸다가 바람에 몸을 맡기며 흩날린다.
이 길의 풍경은 금세 다른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중심이기 때문에. 지금은 주인을 잃은 길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이 길의 해방군이 될 것이다. 지금은 굳게 닫힌 초등학교 정문은 열리고, 깊은 어둠에 감춰진 나무 그네는 밝은 태양아래 제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기꺼이 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공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것이고.
새벽이 있는 삶은 내겐 참 어려운 숙제였다.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한계는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찾게 했다. 새벽이 아니면 밤. 그도 아니면 시간 쪼개기나 멀티 플레이어의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미 활력의 때를 지났으니 이제와 그런 대안이 의미가 있나 싶은데, 성공을 위한 삶의 태도가 아닐지라도 새벽은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새벽을 명상이나 기도, 수행 등 내면의 성찰에 적합한 시간으로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오스는 새벽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매일 아침 태양의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밤을 물리치고 낮을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어 '에오스'(Eos, 새벽)와 '크라티아'(kratia, 힘, 권위)에서 유래한 새벽의 힘인 에오크라티아는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시작과 재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숨도 참고 있는 것 같던 밤이 온몸을 열고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지난 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는 것처럼.
시인 곽재구의 <새벽편지>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은,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나'는 시간을 새벽으로 그린다. 그러기 위해 '고통하는 법을 익히겠다'는 말은 역설인 듯 역설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얘기하듯이 고통을 통해서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이나 사랑의 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로 들리기도 한다.
삶이 나를 새벽으로 이끌고 있으니 새벽맞이에 진심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새벽을 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새벽의 거리를 티끌하나 없이 만드는 사람들과 새벽을 여는 모든 이들의 새벽길에서 뜨거움을 만나고 출렁이는 사랑의 샘을 찾는다.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