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로제,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무척 재미있게 봤다. 호진(김선호)과 무희(고윤정)의 설레는 감정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연애의 과정의 달콤 쌉싸름함이 첫 감상이었다면, 마지막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 돌봄과 치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통역은 불통의 언어를 서로에게 적합한 언어로 치환하여 굳게 닫힌 마음의 문까지 열게 한다. 낭독은 목소리를 통해 화자는 물론이고 청자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행위다. 둘 모두 필히 치유의 과정을 포함한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지구의 80억이 넘는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언어는 그들의 생활과 사고는 물론이고 과거와 현재의 상처까지 풀어내고자 하는 사려 깊은 통역이 절실하다. 아주 친절한 '파파고'는 어쩌면 책을 듣는 사람에게 딱 맞는 언어로 들려주고자 애쓰는 낭독가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싶다.
28년 경력의 프랑스 대중 낭독가 마르크 로제가 들려주는 책과 사람, 문학, 인생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는 낭독에 관한 낭독가의 이야기다. 책은 프랑스 대중 낭독가로서의 첫 소설이며, 낭독을 통한 인간의 성장과 치유의 과정을 그린다.
바칼로레아 시험에도 떨어질 만큼 학교 공부와 거리가 먼 그레구아르는 가정형편을 고려해 수레국화요양원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한다. 주방에서 잡다한 일을 하던 그레구아르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피키에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고, 책방 할아버지였던 피키에 씨는 그레구아르에게 1시간씩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피키에 씨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이 지속되며 그레구아르는 요양원에서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된다. 책을 더 잘 읽기 위해 메모장에 책 읽는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성대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흡을 늘려야 한다는 피키에 씨의 권유로 잠수복을 입고 운하 속으로 들어가 큰소리로 시를 읊는 훈련도 한다.
"보렴, 여기 이건 그냥 마침표가 아니야. 여기서는 긴장감이 느껴지게 읽어야 해. 숨을 한껏 들이마셔. 호흡을 좀 주라고. 대단히 중요한 거야. 너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텍스트를 위해서 말야. 이 세상에 그 어떤 책도 단숨에 써내려 진 건 없어. 글쓰기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작업일 뿐이지. 새 양초가 완전히 타들어갈 때까지 말이야. 전달되는 시간은 불꽃에 맡겨두고."(p.62)
"입을 크게 벌리고 또록또록하게 발음해! 양볼을 움직이고! 입술을 내밀어! 넌 근육이 부족해! 운동선수처럼 근육을 키워야 한다. 호흡을 해, 그레구아르! 숨을 들이마셔! 배에 힘을 주고! 숨을 쉴 때마다 양파나 술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듯이 너의 숨결에서는 문장의 구문구성 냄새가 풍겨 나와야 해."(p.117)
"레퍼토리 하나 없이 목소리만 좋은 것,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야. 레퍼토리는 낭독자가 만드는 거다.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해."(p.116)
책방 할아버지는 낭독을 위한 방법 외에도 그레구아르의 독서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세상의 용도>(니콜라 부비에)를 비롯해 '골짜기'부터 '꼭대기' 수준까지의 다양한 책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방식의 설명과 훈련을 통해 그레구아르의 정신을 변화시킨다. 그의 지도는 책 자체보다는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깊이 있는 통찰이 있다.
"텍스트들 가운데에는 내가 '꼭대기'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단다. 언어의 위대한 모험들이 담긴, 멀리서 여명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지. 그 모든 매혹적인 빛들, 붙잡을 수 없는 찰나의 일출이나 일몰의 녹색 광선, 더운 기류 속에서 매 순간 폭발하는 구름, 선회하는 독수리들의 날갯짓 속에서 증폭되는 꿈. 고독. 고도. 그 아래에서 네가 찾으려 한다면 그 은밀한 '골짜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p.63)
그레구아르의 책방 할아버지이자 낭독을 지도하는 피키에 씨는 게이라는 이유로 당한 폭력과 방관으로 일찍이 집과는 영영 이별한 인물이다. 식자공을 거쳐 35년 동안 서점을 운영하면서 많은 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런 그도 그레구아르와의 만남을 계기로 책과 진실한 만남을 가지지 못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그레구아르의 낭독이 피키에 씨의 인생을 정돈하도록 만드는 순간이다.
책과 담을 쌓은 20대 청년과 책방 할아버지 70대 노인의 만남. 책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우정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계급이나 사회 문화적 배경, 나이나 학력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의 우정과 사랑은 놀라운 효과를 보여 준다. 가장 큰 것은 고독한 노인요양원의 변화다. 여러 인물들의 소통과 연대, 화합과 긍정의 시너지는 죽음을 기다리는 요양원을 생생한 서사가 요동치는 공간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요양원의 의사는 그레구아르를 처방한다. 죽음을 앞둔 셀레스틴 모렐의 유언은 그레구아르의 낭독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들의 삶에 그레구아르의 목소리는 구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두려움의 손을 마주 잡도록 이끈다. 바로 낭독이 갖는 무한의 가능성이다. 낭독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품고 있던 무거운 주제는 가벼워지고 큰 울림이 된다.
인상적인 장면은 1층부터 4층까지 이어진 14개의 물을 비운 변기 배관을 통해 그레구아르는 목소리가 전달되는 순간이다. '라디오 수레국화'라는 명칭으로 저녁 8시 정각에 낭독이 시작되며 모두에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의 유골이 종이의 한 부분이 되고 책이 되는 장면도 충격적이다. 생전의 피키에 씨 소개로 그레구아르는 한 제지 제작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가는데, 그는 피키에 씨의 유골을 100g씩 30개 꾸러미로 나누어 펄프 혼합 탱크 안에 몰래 쏟아붓는다. 피키에 씨의 유골이 아셰트 출판사의 문고판 책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조선의 규방은 전문 낭독가 '전기수'의 목소리에 울고 웃었다. 유럽의 19세기는 작가 낭독회의 절정기였다고 한다. 그 중심에 찰스 디킨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는데, 그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느라 최소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고 연기하듯 낭독했다고 한다.
가와시마 류타의 <뇌력 일기장>에는 낭독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뇌 관찰 실험 결과인데, 글을 소리 내어 낭독할 때 전두엽을 중심으로 뇌 전체가 눈에 띄게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감각기관을 동원해 읽기 때문에 뇌는 동시에 여러 가지 작업을 실행하고 처리하느라 분주해지며 이른바 멀티 태스킹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소리의 변주, 표정, 몸짓, 눈빛의 하모니를 마주하며 듣는 것은 마찬가지의 과정을 소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낭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독서를 통한 몸과 마음의 변화는 낭독의 힘에 대한 신뢰의 결과물이라 믿는다. 스스로 책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낭독에 빠져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