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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19. 2020

조르바, 죽음을 극복한 자유로운 영혼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사람이 변하려면 우발적 마주침이 있어야 한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와의 만남은 우발적 마주침이었다. 어떤 독서인의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책 한 해 한 권은 꼭 읽기, 라는 열정적인 각오 한 문장을 마주하고, 어떤 작가이기에, 어떤 작품이기에, 하는 의문이 들었고,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것이 내게도 특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적어도 그의 작품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팬이 되었다.


사용 인구가 1천만 명도 안 되는 언어의 작가가 세계적 문호가 된 경우는 카잔자키스밖에 없다고 한다.

   

작가(작품의’나’)는 평생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 또 인간 구원의 문제를 깊이 사색하고 탐구한다. 영성에 대한 목마름으로 ‘부처’의 집필에도 몰두한다. 그러나 조르바는 인간 구원에 대한 몰입과 고민 없이도 세상의 모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신념을 온몸으로 베풀고 살아가는 인물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자유로운 영혼의 기질은 빛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엘레니 카잔자키스가 말하는 대로, 먹물과 민중을 대표하는 사람 사이의 대화([니코스 카잔자키스, 타협하지 않는 자])이다. 작품은 격동의 시대를 산 두 주인공의 정신적·육체적 모험과 고통을 다루고 있다. 문장은 화려하다. 수사가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하다. 어색함이 없어 읽는 사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조르바를 정의하는 세 가지


첫째, 널리 인간을 사랑하는 넘치는 인간미다. 그는 자신도 미처 정의하지 못하는 철학적 인류애를 지녔다.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심지어 모두 꺼리는 창부에게도 그는 마음을 베풀고 차별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공감하며 감싼다.


마음대로 사는 것 같으나 나름의 계획이 있다. 65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정신적으로도 맑은 인물이다. 일과 쉼의 경계가 분명하며, 사고의 체계가 일반의 사람들과는 다른,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개구쟁이이며 풍류를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인물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영혼 깊숙이 흔적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와 조르바”를 호명한다. 오랜 시간을 심취해서 연구하며 영성을 탐구했던 ‘부처’보다 조르바를 꼽고 있다. 조르바를 만난다면 누구를 마음속에 진한 자취를 갖게 될 것이다.


둘째, 구속의 끈을 잘라낸 자유로운 영혼이다.  조르바는 ‘나’에게 자신이 매인 끈을 잘라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절대로 그것을 잘라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인간의 “정신은 알뜰한 주부와 같아서” 늘 세상의 것에서 허무를 느끼면서도 과감히 던져버리려는 시도조차 못 한다고 말한다. 냉정한 진단이다. 또한 ‘정신을 놓는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고 마지막 하나를 던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정확히 '나'를 꿰뚫고 있다.

“아뇨, 대장! 대장은 자유롭지 않수다. 대장이 매여 있는 줄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조금 더 길기는 하지만 그뿐이오. 대장, 대장은 조금 긴 끈을 갖고 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끈을 잘라내지는 못했수다. 만약 그 끈을 잘라내지 못하면……”

조르바의 진단에 당황한 ‘나’는 언젠가는 끈을 잘라낼 거라고 말하지만, 조르바는 회의적이다.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그의 인생을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라고 말한다. 그의 진단은 명쾌하고 분석적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품점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저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 뭔가 하나는 꼭 숨겨 놓죠. 정신이라는 놈은 결코 끈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그 악당은 손아귀에 그 끈을 꽉 쥐고 있답니다. 그 끈을 놓치면 그놈은 망하는 거니까요. 불쌍하게도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며,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

반면, 조르바를 묶어 놓은 끈은 없다. 그는 이미 자유롭고 가볍다.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부터도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갑니다.”


셋째는 죽음과의 대결이다. ‘나’는 조르바가 “삶을 사랑하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고백한다. 프롤로그의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나는 책이 좋아졌고 조르바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조르바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그는 죽음 앞에서 파이팅 넘친다. 그만의 죽음 극복 방식은 마치 죽음, 오기만 해 봐! 박살을 낼 테니,라고 외치고 대항하는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난 말이죠. 매 순간 죽음을 응시합니다. 죽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죠. 하지만 한 번도, 절대로 한 번도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지는 않죠. 아뇨, 죽는 게 조금도 좋지 않아요! 나는 자유로운 존재 아닙니까? 그렇다면 난 절대로 죽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극복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죽음은 공포이고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다가온다. 내가 경험한 죽음은 처절하고 너저분하고 할퀴고 얄궂었다.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아는 한 죽음을 극복한 사람은 모두 책과 영화에서였다. 실제는 책이나 영화와 다르다. 실제 죽음을 앞둔 이의 발화는 객관적이지 않다. 날것 그대로이며 날카롭다. 책과 영화 속 인물들에게 활자와 영상을 걷어낸다면 다를 것이다. 활자나 영상은 재현이다. 눈앞에 닥치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모든 과정의 점잖은 공유다. 그래서 책이나 영화에서는 죽음의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작품을 읽고 나서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 키호테(Don Quixote)』가 생각났다. 조르바의 행적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고 행동이 앞서는 무모한 사람이지만 약자를 보살피고 돕고자 하는 인류애가 있다. 허황된 꿈을 좇는 듯 보이지만 이상을 추구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책 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도 알고, 삶을 소풍처럼 산다. 평범한 가정에서의 남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지만, 정의의 가치와 사람을 믿는 믿음이 있고, 믿음은 순수하고 무모하기까지 하다. 인물 유형으로 분류하면 전형적인 돈키호테 형 인물이다.


한 사람의 족적에 이렇게 많은 것이 있다면, 꼭 만나야 할 사람이고 쉽게 지울 수 없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 사람이기에 점잖고 고요하고 때론 답답하기만 한 인물을 춤추게 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


사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르바는 갈탄광 사업으로 ‘나(작가)’가 입은 경제적 손실을 자신에 대해 그가 쓴 작품을 통해 복구하도록 해 주었으니, 조르바의 성품대로 깔끔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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