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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08. 2020

길 잃은 아이들의 길 찾기 프로젝트

[서평]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


언젠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종교적인 목적은 아니다. 등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크건 작건 배낭 하나로 한 달여를 걸으며 자족의 의미, 비움의 의미를 체험하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싶다. 거기에 깊이 묻어두고 미처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내 속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어 치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상의 길과 하나가 되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다른 이들의 상처도 만나고 도움과 나눔이 적절히 섞이고, 각자의 순례의 이유가 무엇이든 따로 또 같이 하는 그 속에 한 번쯤은 놓이고도 싶다.


걷는 길은 해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엔 떠나는 인생과 닮았다고 <걷는 인간, 하정우>는 말한다. 그래서 걷는 것 만으로도 삶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한다. 그냥 흘러가듯이 걷다 보면 답을 갈구하지 않아도 삶은 어딘가에 놓인다. 걷기의 놀라운 효과를 수많은 순례객들의 숫자에서, 호모 비아토르의 증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걷기를 교육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인 교육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쇠이유는 세계적인 도보여행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2000년에 설립한 청소년 교화 단체이다. 우리말로 ‘문턱’을 뜻하는 단체 이름에는 걷기를 통해 소외된 청소년들이 사회의 문턱을 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소년들은 학교 문화가 강제하는 육체적 부동성을 힘겨워한다.


학교라는 틀 자체에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었다. 가정에서도 안정적으로 아이를 살피고 학교에서도 무리한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를 구속이라고 느끼면서도 무난히 그 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가정과 학교 사이의 한 부분이라도 어긋나서 삐걱거리는 상태의 아이라면 틈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 틈으로 튀어나가곤 한다. 학교 현장에서 내가 만났던 아이도 그런 아이였다. 마음대로 날뛰는 자신의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있던, 아직 어렸지만, 순간의 흔들림은 인생의 방향을 꺾이게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아이들에게는 징벌이 아닌 교육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은퇴한 장년들에게는 자신들의 교육적 신념을 이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보람과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합리적인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곳에 가두는 징벌보다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에도, 사회적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이 프로그램은 장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한 학급에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마음을 통제하며 규칙에 맞게 행동하도록 한 명의 교사가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돌발 상황이 매일 벌어지는 것이고 그 수습은 고스란히 현장의 또 다른 주 업무가 되어가고 있다. 학교는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조심스럽다.


2019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교육부)에 따르면 학교급별로 초 3.6%, 중 0.8%, 고 0.4%가 학교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나타났다.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이 조사 결과는 신뢰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많은 유형의 학교폭력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거나 은폐되고 있고 조사에 참여하는 아이들도 그 사실을 알면서 형식적으로 응답한다.


일반적으로 한 가정에 하나 또는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말하는 부부도 많아지는 이때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좋을 것을 마음껏 주고자 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결혼 초기, 아이를 방치하거나 과잉 돌봄으로 잘못 키우는 주변을 보며, 부모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에 한해 자녀를 갖도록 해야 한다, 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무려 30년 전 친구와 나누었던 말이 새삼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은 낯선 경험이다. 부모가 된 이들도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처음이다. 실수와 실패가 따를 수밖에 없다. 실패에 대비한 후속 조치를 좀 더 세밀하게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소년원 대신 걷기라고요?"
쇠이유의 걷기 프로젝트를 소개받은 아이들은 놀란다. 걷기는 그들이 예상한 처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걷기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이다. 쇠이유의 걷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100일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2,000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오로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이 특별한 여정에는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해주는 성인 동행자가 언제나 함께한다. 동행자 곁에서 아이는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간다. 위기에 처한 아이를 위해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려는 사회의 냉소와 허무주의에 맞서 쇠이유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문턱을 넘는다.


”함께 문턱을 넘고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하며 함께한다”, 는 이 프로그램을 접하고 나서 바로 그 아이가 떠올랐다. 한때 크게 방황해서 소년원에 가야 했던 그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었다면.... 내가 그 길에 동행이 될 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프로그램의 결과가 완벽하게 성공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프로그램에서마저 뛰쳐나와 통제되지 않는 길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동행하는 성인이 언제나 올바르고 냉철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청소년의 일탈과 그 후에 학생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비용과 운영의 결과는 미리 컴퓨터처럼 예측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여하는 모두는 감정이 지배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전적 의미에서의 처벌은 자신이 세상에서 배척당했다는 느낌과 거기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엇나가려는 생각만 강화한다.


현재 국내 거주 학교 밖 청소년은 약 35만 명, 이중 특정한 목표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생이 11퍼센트이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행청소년(가출하거나 보호시설 사법기관의 감독을 받는 경우)이 6퍼센트다.(교육 및 공무원 자료마당 참고, 2019) 학교 밖 아이들이 모두 비행청소년은 아니지만, 학교 밖의 아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모두 아픈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 중에서 책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사법기관의 감독을 받는 청소년들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이 학생들은 지역의 보호관찰관들과 연계되지만, 보호관찰관이 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단 한 명이라도 아이의 장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가두는 징벌보다 낫지 않을까. 오래전 이 책을 읽고 난 후 학부모와의 상담에서, 아이와 소통을 힘들어하고 많이 부딪치는 부모들에게, 부모 중 한 분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우선이라면, 제주 올레길 걷기나 국토대장정을 해보시라고 권했었다. 다른 대안이 없어도 그저 옆에서 묵묵히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 과정의 힘겨움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 어느 것보다 효과적인 소통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을 읽은 지금, 그러한 생각은 확신에 가깝다.


걷기가 완벽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여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마주할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자신의 길을 생각하게 되고 걷는 과정에서의 다양한 마주침은 스스로를 무기력에 빠지지 않게도 한다. 자연은 가장 좋은 치료제다. 쉽지 않은 여정에서 인생을 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 보면, <걷는 사람, 하정우>처럼 "먼 길을 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음 걸음을 내이는 것뿐"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터득할 수도 있고,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인생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려나가기로"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힘들다, 걸어야겠다.'


비행 청소년이라 부르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비행 청소년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을 비행(非行)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아이들은 비행 청소년이 된다. 그들의 비행은, 어쩌면 자격이 없는 부모가, 좁은 교실에 넘치는 에너지를 가두는 학교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만든 것일 수 있다. 그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치유나 돌봄 과정에, 걷기를 체험하게 할 수 없다면, 견딜 수 없어 뛰쳐나간 아픈 아이들에게 '힘들다, 걸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새로운 교육적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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