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연필 Mar 12. 2024

사랑의 시작


1960년대 초반.

유명한 명동의 한 다방.     


커다란 DJ박스 안에는 LP가 가득하고 DJ는 나지막이 말한다.

“그럼, 신청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어서 패티김의 ‘초우’가 흐른다.     


가슴속에 스며든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     


새로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다방은 깔끔하다. 의자마다 씌워져 있는 다방 이름이 새겨진 커버도 아직 하얗고 단단하게 풀이 먹여져 있다.


테이블에는 데이트하는 듯이 보이는 청춘남녀, 뭔가 토론을 하는 듯 열띤 공기가 감싸고 있는 몇 명의 무리, 연신 수첩을 들여다보며 자꾸 카운터 쪽을 힐끔거리는 게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는 듯한 중년 남성, 유행하는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낸 여성들이 보인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청년은 옷차림을 보아하니 대학생이다. 잘 다린 교복 옷깃에는 학교 배지까지 선명하다. 실내조명이 어두운 편이지만 가무잡잡한 얼굴과 마른 몸 때문인지 눈빛이 더 선명해 보인다. 청년은 살짝 상기되어 있지만 굳은 표정으로 실내를 한번 빠르게 훑어보더니 자리를 잡는다. 가방을 옆 의자에 놓고 손목의 시계를 한번 보고 담배를 꺼낸다. 청년은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내내 출입구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청년이 앉은자리에서는 출입구가 아주 잘 보인다. 아마 그래서 그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와서 엽차 잔만 내려놓고 간다. 동행자가 오면 주문하겠다고 했나 보다.    

 

청년은 꽤 긴 시간 긴장되어 보이는 표정으로 출입구와 시계를 번갈아 보고 있다.

DJ가 선곡해 주는 다방의 음악은 어느샌가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로 바뀌어 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     


청년은 살짝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위의 큰 성냥갑을 열어 성냥개비들을 꺼낸다. 종업원 얼굴에 경계심이 스쳐 지나간다. 성냥을 저렇게 낭비해 버리는 손님들이 더러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그냥 어질러놓고 가기 일쑤라 고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청년이 능숙하게 성냥 탑을 쌓기 시작하자 종업원은 멍하니 쳐다보다가 마침 자기를 부르는 다른 테이블로 움직인다.


테이블 위는 이제 청년이 쌓은 높고 낮은 성냥 탑들로 도시를 이룰 것 같다. 한두 번 쌓아본 솜씨가 아니다. 그러는 사이 다른 테이블은 이미 몇 번이나 손님이 바뀌었다.     


청년은 성냥 탑들을 분해해서 성냥들을 성냥갑 안에 차곡차곡 넣는다. 시계를 다시 한번 보고는 이번에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청년은 30여 년 후 자신의 딸이 이 노트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중에 청년의 얼굴은 긴장이 좀 풀어지는 듯하다. 한 페이지 정도 썼을까, 시계를 다시 본 청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다. 청년은 커피를 주문하고 종업원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미소가 보인다.     


청년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다. 입주 가정교사인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 집주인의 사촌누이라는 그 여인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그 이후 친구에게 몇 번의 밥과 술을 사주며 부탁하여 겨우 그 여인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청년보다 4살 위의 그 여인은 이미 학교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여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비혼주의자였기에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한 청년이 그 여인의 안중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청년은 그냥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에 들어와 순식간에 큰 나무로 자라 버린 이 씨앗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청년은 장소를 말하며 꼭 나와 달라고 이야기했다. 여인의 표정으로는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청년은 기다린다.     


청년이 다방에 들어선 시각에서 이미 4시간이 흘러있다.

청년은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냥 노트에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 문장만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준다는 듯이.

그러다가 청년은 출입구의 문이 열리는 기척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다.     


간결하지만 정성을 들인 화장과 옷차림의 여인이 들어서며 가볍게 두리번거린다.


여인을 발견한 청년은 크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호,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청년이었군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배경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가 흐르고 있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현명한 사람들은 말하죠,

어리석은 사람들만이 사랑에 빠진다고.

그래도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당신을 사랑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죄가 될 거예요.

그래서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Like a river flows

Gent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

Some things were meant to be     

강물이 흘러

부드럽게 바다로 가듯이

내 사랑, 그렇게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내 손을 잡아요.

내 인생도 가져가 주세요.

그래요,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작가의 이전글 드라이브 마이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